[뉴스룸에서] 성희롱 변명의 교본 ‘용감한’ 윤창중, “과연 특이한 걸까?”

기사승인 2013-05-17 03:5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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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키 칼럼] 청와대, 워싱턴, 의회연설 같은 단어 몇 개만 지워보자. 배우, 대사, 플롯까지 어찌나 낯익던지 드라마였다면 표절시비라도 일었을 것 같다. 변주 노력이 있긴 했다. 이번엔 ‘블랙아웃’과 ‘착각’이 등장하지 않았다.

윤창중 전 청와대 대변인은 기자회견에서 그날 밤 일을 해명하며 “술 취해 기억나지 않는다”거나 “술집 종업원으로 착각했다”고는 말하지 않았다. 배경이 고려됐을 거다. “술이 원수”라는 자책이야 한국 중년들에게나 통할 말이지 미국 경찰이 ‘만취’와 ‘블랙아웃’을 정상참작해줄 리 없다. 백악관 길 건너편에 있다는 4성급 호텔 와인바와 여성 접대원도 어울리는 조합은 아니다. “마담으로 착각했다”는 변명 역시 하지 않길 잘했다. 그건 너무 한국식이다. 국제변호사가 등장하고 범죄인 인도 조약을 논하는 마당에 그 정도 글로벌 마인드야 필요했겠다.

“술 취해서”와 “착각해서”를 빼면 기자회견은 마치 성희롱 변명의 교본처럼 흘러갔다. 지난 11일 해명 기자회견을 동영상으로 반복해 돌려보다가 ‘가해자들끼리 돌려보는 매뉴얼이라도 있는 걸까?’ 궁금해졌다. 성희롱 변명의 매뉴얼 1단계는 피해 여성 탓하기다. 그는 5분여에 걸쳐 인턴 여성이 얼마나 실수를 많이 했고, 업무에 서툴렀으며, 국가적 중요 인물인 자신이 당한 피해가 심각했는지 조목조목 따졌다. ‘스토리 by 윤창중’ 속 인턴은 한심했다. 중요한 순간마다 사라졌고, 식권조차 챙기지 못했으며, 새벽에 남자 혼자 묵는 호텔방을 불쑥 찾아갔다.

그렇게 “너무나 매끄럽지 못하게” 일을 처리하고 “대체 누가 가이드인지”를 되묻게 하는 미숙한 초짜를 “단호하게 질책하는” 힘든 일을 감당한 건 물론 상사이자 관리자인 윤 전 대변인이었다. 안타깝게도, 그는 마음마저 약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제 딸 밖에 안 되는 나이의 교포를 심하게 꾸짖었다는 자책” 때문에 인턴에게 “30분쯤” 술을 사며 위로할 시간을 냈다. “여자 가이드와 차량이 40분이나 늦어서” 화를 많이 냈을 만큼 일정이 빽빽했던 그로서는 큰맘을 먹은 셈이다.

본론은 가능하면 짧고, 부차적인 문제로 처리하는 게 좋다. 기자회견에서도 후반에 배치됐다. 성패를 가르는 건 어휘력이다. 엉덩이, 허리, 치다, 움켜쥐다, 속옷, 알몸 같은 각기 다른 농도의 말들이 팩트를 다투도록 판을 벌여야 한다. 이제 사건은 진실게임으로 변신해 알아서 굴러가게 된다.

국가인권위원회가 발간한 ‘성희롱진정사건백서’를 보면 매뉴얼을 따른 모범답안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가해자들은 “격려하는 차원에서” “업무를 가르쳐주느라” 부하 여직원을 끌어안고, 모텔방으로 부르고, 엉덩이를 쳤다. 이유는 “업무가 서툴러서” 혹은 “딸 같은 마음에서”였다.

인권위 통계에 따르면 직장 성희롱의 80%는 중간관리자 이상 남성이 여성 평직원을 대상으로 한 사건이다. 평균적 가해자는 40~50대 관리직 남성, 피해자는 입사 1~2년차 20대 신입 여직원이었다. 이런 구도에서 가해자 버전의 이야기마다 ‘노련하고 유능한 상사 vs 미숙한 신입 여직원’이 대결하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어쩌면 가해자 머릿속에서 성희롱은 ‘서툰 여직원들로부터 직장을 지키다가 생긴 부수적 피해’로 각인돼 있을지 모르겠다.

첫 여성 대통령의 첫 방미 이벤트였다. 썩 환영받지 못하던 대변인이 이 정도 풍파를 일으킨 걸 보면, 윤 전 대변인은 용감한 사람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는 과연 대단히 특이한 사람이었을까.

국민일보 쿠키뉴스 이영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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