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야흐로 녹취 전성시대… 속기사 업계 호황 '1시간 35만원'

기사승인 2014-04-16 03: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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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키 사회] 바야흐로 ‘녹취’ 전성시대다. 회사 학교 병원 경찰서 등 갈등과 분쟁이 생기는 곳은 물론이고 대학 강의실 같은 일상 공간에도 녹취 문화가 뿌리를 내렸다. 너도나도 ‘녹취록’을 쏟아내면서 속기사 업계는 전례 없는 호황을 맞고 있다. 녹취의 대중화는 스마트폰마다 손쉬운 녹음기능이 있어서 가능했다.

올해 중학교에 진학한 A(13)군은 반 친구들에게 ‘왕따’를 당했다. 끔찍한 생활에서 그를 구해준 건 스마트폰이다. 지난달 말 하굣길에 자신을 괴롭히던 친구들에게 붙잡힌 최군은 몰래 스마트폰 녹음 앱을 켰다. “때리지마. 이제 나 좀 그만 괴롭혀”라는 최군의 말과 “다 네가 잘못해서 우리한테 당하는 거야”라는 친구들 음성이 고스란히 녹음됐다. 최군은 이를 부모에게 들려줬고 부모는 괴롭힌 친구들의 부모에게 이 녹음을 들려주며 사과와 재발 방지 약속을 받아냈다.

직장인 B(29)씨는 여자친구(27·여)의 행동이 의심스러웠다. 자신과 있을 때 휴대전화가 울리면 받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다른 남자가 있는 듯했지만 ‘증거’가 없어 속만 태우다 자신의 친구와 여자친구 사이에 뭔가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A씨는 친구를 찾아가 실토를 받아내며 그 내용을 녹음했다. 여자친구와 확실하게 관계를 정리하자는 생각에 속기사에게 맡겨 녹취록을 만든 뒤 여자친구에게 보여주며 결별을 선언했다.

대기업에 다니는 C(26·여)씨는 회사 선배들과 갈등을 겪었다. 업무 처리 문제로 시작된 갈등은 옷차림이나 이성문제에 대한 간섭으로 이어졌다. 항의하자 집단 따돌림 형태로 악화됐고 욕설 등 폭언을 듣는 날이 많았다. C씨는 결국 선배와의 대화를 스마트폰으로 녹음한 뒤 회사에 녹취록을 제출했다. 그 선배는 징계위원회에 회부돼 부서이동 조치를 받았다.

대학가에서도 녹음은 일상이 됐다. 고교 시절부터 ‘인강’(인터넷 강의)에 익숙한 요즘 대학생들은 강의 내용을 녹음해 파일을 인터넷으로 공유하는 경우가 많다. 올 초 연세대를 졸업한 D(24·여)씨는 “학점 경쟁이 치열해서 강의 내용을 녹음해 반복 청취하는 학생이 많은데 친구들끼리 녹음 파일을 공유하다보면 수업 내용이 인터넷에 고스란히 유출되는 경우가 생긴다”며 “이 때문에 교수님이 화를 낸 적도 있다”고 말했다. 취업 준비 학원가에서도 이런 논란은 늘 벌어진다. 강사의 ‘지적재산’인 강의 내용이 무단으로 유포되기 때문이다.

의료분쟁이 잦은 병원도 녹취가 빈번하게 이뤄지는 공간이다. 의료사고를 의심하는 환자 가족들은 의료진과의 대화를 수시로 녹음한다. 병원 측도 직원들에게 ‘의료사고를 주장하는 환자 가족이 두 번째 전화를 걸어오면 소송이 예상되는 상황이니 통화내용을 무조건 녹음하라’고 당부하곤 한다. 한국의료분쟁조정중재원 관계자는 15일 “최근 피해자 측이 녹취록을 증거로 제출하는 경우가 많다보니 병원들도 직원 입단속과 맞대응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고 말했다.

경찰이나 검찰 수사 과정에도 녹취가 전면에 등장했다. 경찰은 조사받기 꺼려하는 참고인과의 통화 내용이 수사에 필요하다고 판단될 때 이를 고지한 뒤 녹취록을 만든다. 검찰도 면회실 등에서 피의자와 나눈 대화를 녹음해 증거로 쓰기도 한다. 반대로 피의자가 강압적 수사를 우려해 몰래 녹음하는 경우도 많다. 이런 녹취를 막으려고 수사기관은 요즘 소환자 소지품 검사에 품을 많이 들인다.

이렇다보니 녹음 내용을 녹취록으로 만들어주는 속기사 업계는 호황이다. 녹음 분량이 30분이면 보통 20만원, 1시간이면 35만원쯤 들지만 속기사 도장이 들어간 녹취록은 더 객관성을 갖는다고 여겨 많이 찾는다.

서울 양천구에서 14년째 속기사무실을 운영하는 조모(40·여)씨는 “최근 1년 새 녹취나 녹음파일을 맡겨 속기록을 만들어달라는 사람이 30% 정도 늘었다”며 “10년 전만 해도 ‘녹취’라는 단어조차 모르는 사람이 많았는데 요즘은 누구나 쓰는 말이 됐다”고 했다. 2011년 4800명이던 속기사 시험 응시자도 불과 2년 만인 지난해 7100명으로 48%나 급증했다.

하지만 녹취록이 ‘만능’은 아니다. 서울지역 법원의 한 부장판사는 “재판에 녹취록을 제출해도 결정적 증거로 작용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며 “특히 개인이 만든 녹취록은 왜곡됐을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국민일보 쿠키뉴스 박요진 기자 true@kmib.co.kr 기사모아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