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장일치 평결’ 뒤집힌…국민 없는 ‘국민참여재판’

기사승인 2013-11-08 02: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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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장일치 평결’ 뒤집힌…국민 없는 ‘국민참여재판’

[쿠키 사회] 지난해 대선에서 박근혜 후보를 비방한 혐의 등으로 기소된 안도현(52·우석대 교수) 시인에 대해 법원이 일부 유죄 판결을 내렸다. 국민참여재판으로 진행된 재판에서 배심원단은 만장일치로 무죄 평결을 내렸지만 재판부가 결론을 뒤집어 논란이 예상된다.

전주지법 형사2부(부장판사 은택)는 7일 “안 시인의 허위사실 유포 혐의는 무죄지만 후보자 비방 혐의는 유죄”라며 벌금 100만원의 선고를 유예했다. 재판부는 “안 의원이 박 후보를 낙선시킬 목적으로 비방한 사실이 인정된다”며 “다만 ‘피고인을 처벌하지 않는다’는 배심원의 평결을 존중해 선고를 유예한다”고 밝혔다. 선고유예는 유죄 사실은 인정되지만 처벌은 하지 않는 것으로 죄가 경미한 범인에게 선고된다.

안 시인은 문재인 후보의 공동선거대책위원장이던 지난해 12월 10일과 11일 ‘사라진 안중근 의사의 유묵은 1976년 3월 17일 홍익대 이사장 이도영이 박정희 대통령에게 기증했습니다’ ‘도난된 보물 소장자는 박근혜입니다. 2001년 9월 2일 안중근의사숭모회의 발간도록 증거자료입니다’ 등의 글 17개를 자신의 트위터에 게시했다. 문제가 된 안 의사의 유묵은 ‘恥惡衣惡食者 不足與議(치악의악식자 부족여의)’라는 글씨로 ‘궂은 옷 궂은 밥을 부끄러워하는 자는 더불어 논의할 수 없다’는 뜻이다.

안 시인과 검찰은 재판 결과에 불만을 드러내며 항소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유죄+선고유예…배심원 무죄 평결 의식한 ‘어정쩡 절충’

전주지법 형사2부(부장판사 은택)는 7일 안도현 시인 사건에 대해 일종의 절충안을 택했다. 배심원단의 전원일치 무죄 평결에 대해 ‘기속력이 없다’며 일부 유죄를 인정했다. 대신 배심원단의 평결을 존중한다는 의미에서 선고를 유예했다. 재판부는 이러한 절충을 ‘제3의 길’이라고 표현했다. 유죄를 선고하면서도 처벌하지 않는다는 재판부의 판단이 ‘모순’이라는 지적도 없지 않다.

◇박근혜 후보 낙선시킬 목적으로 비방=사건의 쟁점은 안 시인이 지난 대선 당시 트위터에 올린 박근혜 후보 비방글 17건이 ‘허위사실공표’와 ‘후보자 비방죄’에 해당하는지 여부였다.

재판부는 안 시인의 트위터 글이 ‘박 후보가 안중근 의사의 유묵 도난에 관여했거나 도난된 유묵을 소장했다’는 사실을 전제한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리고 해당 트위터 글들이 ‘진실’은 아니라고 봤다. 의혹을 제기한 안 시인 측에 입증 책임이 있지만 제출된 자료만으로는 ‘진실’ 여부가 소명되지 않기 때문에 법률적 허위사실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재판부는 안 시인이 그 사실이 허위임을 알면서 글을 올린 것은 아니기 때문에 허위사실공표죄에 해당하지는 않는다고 결론 내렸다. 범죄행위임을 알면서 행위를 한 것은 아니라는 의미다.

하지만 트위터 글이 후보자 비방죄에는 해당한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글 내용이 대통령 후보의 능력, 자질과 직접 관련 없는 도덕적 흠집을 내는 것”이라며 “박 후보를 낙선시킬 목적으로 비방한 것”이라고 말했다.

◇배심원 평결 기속력 없지만 최대한 존중=재판부의 판단은 안 시인의 혐의에 대해 모두 무죄로 판단한 배심원 평결과는 배치된다. 재판부는 “일반 국민의 눈높이에 따른 배심원의 의견에 따르는 것이 민주사회의 시대적 요청에 부합하는 것”이라면서도 “평결이 법관의 직업적 양심을 침해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만 기속력을 가진다”고 밝혔다. 배심원들의 법리적 오류와 정치적·감정적 평결에 따른 유무죄 판단을 법관이 받아들일 수 없다는 점을 명백히 한 것이다. 다만 재판부는 ‘피고인을 처벌하지 않는다’는 배심원단의 의견을 판결에 반영하기 위해 법원이 내릴 수 있는 최저형인 ‘벌금 100만원의 선고유예’라는 최종 결정을 했다고 밝혔다.

재판부가 모순적인 판결을 내렸다는 지적도 나왔다. 한 법조계 관계자는 “일반 재판이었다면 유죄로 판단한 이상 선고유예를 할 사안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며 “재판부가 무리하게 절충을 하려다 보니 이도 저도 아닌 판결이 나온 것 같다”고 말했다. 후보자 비방죄는 양형기준상 8개월 이하의 징역 혹은 100만∼300만원의 벌금형에 해당한다.

이런 비판을 의식한 듯 재판부는 판결문 말미에서 “평결과 판결 중 어떤 것을 우월적 지위에 놓을 것인지, 아니면 쌍방 조화적 지위에 있게 할 것인지에 대해 국민의 다양한 의사를 수렴해 공감대를 형성한 뒤 입법적 결단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밝혔다.

“나는 법 거미줄에 걸린 나비 같다…애매한 선고 내리기까지 언어유희”

7일 선거법 위반 혐의로 일부 유죄를 선고받은 안도현(52) 시인이 재판부를 맹비난했다.

안 시인은 재판 직후 전주지법 1호 법정을 나오면서 “국민참여재판에서 전원일치 무죄 평결을 내렸음에도 재판부가 유죄를 선고해 굉장히 안타깝고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항소할 뜻을 밝힌 그는 “검찰의 기소는 국정원 사건에 대한 물타기 차원이었으며 기소 자체가 잘못됐다”며 “법과 정의가 살아 있다는 것을 이제 국민이 믿게 될 것인가”라며 비판했다.

그는 이후 자신의 트위터를 통해 “재판부가 결국 국민참여재판 배심원들의 전원일치 무죄 평결을 뒤집었다. 배심원들과 나를 무시하고 조롱한 것으로 본다”며 “법이라는 거미줄에 걸린 나비의 기분이 이럴까”라며 한탄했다. 안 시인은 이어 “재판부는 재판을 한 게 아니라 법의 이름으로 곡예를 하면서 묘기를 부렸다. 애매한 선고를 내리기까지 언어유희로 일관했다. 최고 권력자에게 누를 끼치지 않으려는 충신을 보는 것 같았다. 법과 정의는 죽었다”고 선언했다. 특히 “명백한 사실에 바탕을 둔 것이라도 박근혜에게 질문하면 안 된다. 질문하면 비방죄가 성립된다. 아, 그래서 검찰은 박근혜를 조사하지 않고 질문조차 하지 않았던 것이었구나”라며 검찰을 힐난했다.

안 시인이 재판 전날 트위터에 올린 글도 회자되고 있다. 그는 “겉으로 너무 표시나지 않게,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살고 싶은데요. 선배에게 말했더니 이런 말을 해주셨다. 그러기에 말이야, 미친놈들이 물뱀을 독사로 만드는 꼴이잖아. 아, 나는 물뱀 보면 덜덜 떠는 개구리가 되고 싶은데”라는 글을 올렸다.

1961년 경북 예천에서 태어난 그는 대구 아양초교와 경북대 사범대 부속중, 대구 대건고를 졸업한 뒤 1980년 전북 익산 원광대 국문과에 입학했다. 1981년 대구매일신문 신춘문예에서 시 ‘낙동강’으로, 198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서는 시 ‘서울로 가는 전봉준’으로 당선됐다.

1985년 이리중 국어교사로 부임했으나 전교조 가입 이유로 4년 만에 해직됐다. 이후 1994년 전북 장수군 산서고에 복직됐으나 3년 만에 교사직을 그만두고 전업시인으로 돌아섰다. 현재는 우석대 문예창작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배심원제 뭐가 문제인가

안도현 시인에 대한 배심원단의 평결과 재판부의 판결이 엇갈리면서 국민참여재판 대상이 되는 사건의 범위에 대한 논란이 커지고 있다.

◇국민참여재판 대상 사건 확대가 원인=지난해 7월 이전까지만 해도 국민참여재판은 살인·강도강간 등 성폭행 범죄 등 일부 강력사건과 부패범죄 등에 한해서만 시행됐다. 전문적인 법률지식이 없는 배심원들도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사건이 대부분이었다. 정치적 성향 등이 평결에 개입될 여지도 적었다. 배심원 평결과 재판부 판결의 일치율은 92.2%에 달했다.

문제는 지난해 7월부터 국민참여재판의 신청 대상 범위를 형사합의부 사건 전체로 확대하면서 불거졌다. 명예훼손이나 공직선거법 위반 등 일정 수준 이상의 법률적 지식이 필요한 사건들도 국민참여재판 대상이 됐다. 배심원단의 정치적 성향이 판결에 영향을 줄 수 있는 민감한 사건들도 국민참여재판 대상에 포함된 셈이다.

7일 선고된 안씨의 국민참여재판이 대표적이다. 대선 당시 박근혜 후보를 비방한 안씨에 대해 배심원단은 무죄 평결을 내렸다. 문재인 후보의 ‘텃밭’인 전주 지역 배심원들의 공정성이 논란의 중심이 됐다. 반면 지난 8월 여권에 상대적으로 호의적인 부산지법에서 열린 국민참여재판에서는 허위의 사실로 박 후보를 비방한 전모씨에 대해 배심원단은 유죄 평결을 내렸다. 결국 배심원단이 속한 지역의 정치적 성향에 따라 같은 사안에 대해 상반된 결정이 나온 것이다.

◇정치적 사건은 배제할 수 있도록 법 개정해야=문제는 현재의 사법부가 정치적 사건들에 대한 국민참여재판 신청을 배제할 수 없다는 점이다. 법원 예규는 추가 기소가 예상되는 상황, 피고인의 정신이상이 의심되는 상황 등 소극적인 거부 규정만 두고 있다.

최진녕 대한변협 대변인은 “재판부가 국민참여재판을 배제할 수 있는 실질적 장치가 도입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재판부에 정치적 사건을 배제할 수 있는 재량을 준다 하더라도 실제 효과는 미지수다. 한 판사는 “재판부가 정치적 사건이라는 이유로 국민참여재판에서 배제하면 그 결정에 대한 논란이 생길 게 뻔하다”고 지적했다.

국민참여재판이 ‘국민들의 상식이 정의’라는 가정 위에 도입된 제도인 만큼 일부 사건만 놓고 판단하기보다 장기적인 관점을 가져야 한다는 의견도 많다. 박경신 고려대 교수는 “정치적 사건의 경우 오히려 법원의 판결이 배심원들의 평결보다 들쭉날쭉한 경우가 더 많다”고 말했다. 한 부장판사는 “다양한 선례들이 쌓인다면 일정한 결과로 수렴하는 결과를 보일 것”이라고 전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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