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가 눈물 흘린 독일 땅 다시 밟는 박근혜 대통령

기사승인 2014-03-14 21:5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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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키 정치] 1964년 12월 10일. 작은 키에 단단한 체구를 가진 한 동양인이 독일 북서부 함보른 광산을 찾았다. 그가 마이크를 잡자 한국 광부들이 모여들었다. “나라가 못 살아 여러분들이 이국땅 지하 수천 미터에서 이런 고생을 합니다. 가슴이 너무 아픕니다.” 광부들은 흐느끼기 시작했다. 마이크를 잡은 남자도 손수건을 꺼내 연신 눈물을 닦았다. 바로 박정희 전 대통령이었다.

독일은 ‘고마운 나라’였다. 집집마다 끼니 걱정을 해야 했던 ‘보릿고개’ 시절, 최우방이라던 미국보다도 먼저 상업차관을 한국에 제공한 나라가 바로 독일이었다. 박 전 대통령이 존 F 케네디 당시 미국 대통령에게 구걸하다시피 차관을 요청했다가 거절당한 뒤였다. 그렇게 들여온 1억5000만 마르크(약 3500만 달러)는 우리 경제개발의 초석이 됐다. 1970~1980년대 고도성장기는 독일 상업차관이 원동력이 됐던 셈이다.

아버지가 눈물을 흘린 땅, 일터조차 없는 고국의 아픈 현실 때문에 인력까지 송출해야 했던 곳. 그런 독일 땅에 박근혜 대통령이 역사적인 발길을 내딛게 된다. 오는 25일 요아힘 가우크 독일 대통령 초청으로 3박4일간 국빈방문을 하게 된 것이다. 울던 아버지의 눈을 언론 사진으로 봐야했던 12세 어린이는 이제 현직 한국 대통령, 그것도 첫 여성 대통령에 올라 독일 수도 베를린 국제공항에 첫 걸음을 내딛는다.

박 대통령으로서는 선친(先親)에 대한 기억, 아니 더 나아가 선친이 기필코 이룩하려 했던 대한민국의 모습이 고스란히 떠오를 것으로 짐작된다. 박 전 대통령의 생전을 떠올리며, 50년 동안 발전에 발전을 거듭해온 대한민국의 최근 현대사를 오버랩(Overlap)할 게 틀림없다.

이제 한국은 아버지 시절 6·25전쟁으로 피폐해진 가난한 나라가 아니다. 어느덧 세계 8위 규모의 교역규모를 가진, 선진국 진입을 눈앞에 둔 국가가 됐다. 오로지 국민들의 밥벌이만 걱정할 필요가 없어진 나라가 됐다.

그래서인지 박 대통령은 이번 독일 방문을 통해 아버지와는 다른 고민을 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우리와 똑같이 자유민주주의 진영과 공산주의 진영으로 갈렸던 분단국가 독일이 어떻게 통일을 이뤘으며, 이 통일을 통해 어떤 경제성장·국민통합의 성과를 거뒀는지가 핵심이다. 지난 1월 6일 신년기자회견에서 ‘통일대박론’을 제기했던 박 대통령의 행보가 의미심장한 것도 어쩌면 바로 이번 독일방문 때문이 아니었을까.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대통령으로서 역시 독일 첫 여성총리인 앙겔라 메르켈 총리와 갖는 정상회담도 의미심장하다. 첫 방문지인 베를린에서 통독 관련 독일 인사들을 잇달아 접견하고, 통독의 과정과 방식 등 앞선 경험을 공유할 예정이기도 하다. 어쩌면 연초부터 통일담론을 주도해온 박 대통령이 이 곳에서 남북통일과 관련된 새로운 구상이나 선언을 내놓을 수도 있다.

베를린 일정을 마치면 곧바로 드레스덴을 찾는다. 옛 동독지역의 대표적인 경제중심지였던 이 도시는 전후 독일 경제의 대표주자가 된 ‘히든챔피언’ 강소(强小)기업의 발원지이기도 하다. 분단체제 속에서 동독 공산독재체제로 사그라져가던 과학기술 중심 소기업들이 통독 이후 급성장하며 경제 전문가들 사이에선 ‘독일 통일의 경제적 효과가 가장 극적으로 나타난 도시’로 유명해진 곳이다. 박 대통령으로서는 앞으로 남북통일이 북한지역, 나아가 한국 전체에 가져올 ‘대박’의 효과를 미리 고찰해볼 계기인 것이다.

청와대 고위 관계자는 “이번 독일방문이 단순히 경제협력 중심의 세일즈 외교가 아니라는 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일정이 바로 드레스덴 방문”이라고 말했다. 주철기 외교안보수석은 14일 춘추관 브리핑을 통해 “이번 독일 국빈방문은 유럽연합(EU)의 핵심국가이자 유럽 최대의 경제대국인 독일과 130여년에 이르는 우호협력관계를 더욱 확대·심화하는 한편 우리의 통일기반 조성을 위해 독일의 통일과 통합 경험을 공유하는 중요한 계기가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만큼 박 대통령이 독일을 찾는 이유가 중첩적이라는 의미로 들렸다. 박 대통령은 독일 상업과 교통의 중심지로 우리 교민이 가장 많이 상주하는 서독지역의 프랑크푸르트도 찾는다.

독일 국빈방문에 앞서 박 대통령은 23일 제3차 핵안보정상회의 참석차 네덜란드 헤이그로 향한다. 24~25일 개최되는 이 정상회의에는 전 세계 53개국 정상과 유엔 등 4개 국제기구 대표들이 참가할 예정이다. 박 대통령은 24일 개막세션에서 전임 의장국 정상으로서 모두 연설을 해 국제 평화와 안전에 대한 엄중한 도전인 핵테러의 방지를 위한 국제사회의 공동책임을 강조하고 ‘핵무기 없는 세상’의 비전 아래 국제 핵안보 체제가 추구할 발전 방향을 제시한다.

이번 회의 기간 박 대통령이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와 회동할지에도 국내외 언론의 관심이 쏠린다. 전쟁 범죄에 대해 완전한 형태로 피해국과 피해 당사자들에게 반성과 사과를 했던 독일을 방문하기 바로 직전이기 때문이다. 평소 ‘과거사 반성 없이 관계진전은 없다’는 소신을 피력해온 박 대통령으로서는 일단 아베 총리와 만나지 않을 것으로 관측된다.

핵안보정상회의가 끝나면 박 대통령은 네덜란드 마크 루터 총리와 정상회담, 빌렘 알렉산더 국왕 주최 오찬 등 일정을 소화한 뒤 베를린으로 향한다.

국민일보 쿠키뉴스 신창호 기자 procol@kmib.co.kr 기사모아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