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주’로 7년 만에 돌아온 박찬옥 감독 “인간의 욕망은 매력적”

기사승인 2009-10-21 21: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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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로 7년 만에 돌아온 박찬옥 감독 “인간의 욕망은 매력적”

[쿠키 문화] 등을 둥글게 말고 앉아 시선은 45도 쯤 아래에 둔 채, 그는 천천히 잔을 들어 소주를 한 모금씩 입에 물었다. 왁자지껄한 술자리 한가운데서도 마치 그는 혼자 있는 냥 누구에게 말을 걸지도, 술을 권하지도 않고 조용히 술을 홀짝였다. 섬세한 심리묘사와 치밀한 구성을 특기로 내세우는 감독인 만큼 날카로운 눈빛으로 주변 인물을 관찰하지 않을까라고 짐작했었다. 그런데 그는 그저 가끔은 바닥, 때로는 벽을 쳐다보며 혼자 술을 마셨다. 부산국제영화제 기간 한 술자리에서 본 그 모습이 퍽이나 인상적이었다.

며칠 뒤, 그를 다시 만났다. ‘질투는 나의 힘’ 이후 7년 만에 두 번째 장편 ‘파주’를 발표한 박찬옥(41) 감독이다. ‘파주’는 형부와 처제 간에 생긴 사랑이라는 이름의 감정에 대해 고찰한 영화로, 지난 16일 폐막한 부산영화제에서 아시아영화진흥기구(NETPAC·넷팩)상을 받았다. 심사위원단은 “감독의 시적이고 감동적인 표현방식에 깊은 인상을 받았고, 논쟁의 여지가 있는 문제에 접근한 감독의 용기를 지지한다”고 수상작 선정 이유를 밝혔다.

그는 “(기자를) 두 번째 만나니 마음이 좀 편하네”라며 슬쩍 미소지었다. 술자리에서 받았던 느낌을 얘기하자 “내가 좀 그런 사회적인 노력이 부족한 편이다. 상대를 편하게 해주는 그런 말을 잘 못한다”라고 ‘뭐 그럴 수도 있지’라는 투로 답했다. 쿨한 언니다.

-7년간 뭐하고 지냈나.

“그냥 밥 먹고, 약속 있으면 약속 가고, 일 있으면 일하고 그렇게 지냈다. 한 2년은 프로듀서랑 기획하고 예산 짜고 스태프 모아서 영화 찍으며 보냈고 그 전에는 시나리오 쓰고 그랬지 뭐.”

-영화가 담고있는 스토리가 다층적이라 복잡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결말에 이르기까지 한 세 가지 정도의 이야기가 얽힌다. 은모(서우)와 언니가 부모집에서 살 수 없게 된 상황, 언니의 사고사, 은모와 형부인 중식(이선균)의 관계다. 이 세 가지 줄기가 상호작용해 결국 두 사람 관계의 결말을 짓게 해준다. 하지만 무엇보다 핵심은 은모와 중식의 관계고 나머지는 서브 플롯(sub-plot)이다.”

-사실 영화를 보면 보호자였던 중식이 처제 은모에게 갑자기 남녀의 감정을 느끼는 것 같아서 이해가 잘 안 되기도 하는데.

“왜, 충분히 그럴 수 있다. 중식은 보호자로서 뿐만 아니라 여러가지 면에서 은모를 사랑해왔다. 어두운 방 안에 둘이 있는데 은모에게 자신을 사랑하냐는 질문을 받는다. 그 상황을 가정하면 감정의 흐름이 그럴 수 있지 않을까.”

-“그럴 수도 있다”는 말을 많이 쓴다. 사실 만든 영화의 성격도 그렇고, 특별히 이 부분에 관심갖게 되는 이유는 뭔가

“의식해 본 적은 없는데, ‘당연히 그럴 거다’라는 건 흥미롭지 않잖아. 자기 기질이나 욕망 때문에 일어날 수도 있고, 안 일어날 수도 있는 그런 일들이 훨씬 매력적이지.”

-어떤 면에서 형부와 처제는 좀 통속적인 관계인데, 왜 이런 관계를 설정했나

“시작은 오랜 기간 어떤 사람(A)의 영향력, 또는 보호 아래 있던 사람(B)이 결국 그 보호자(A)를 배신하고 돌아서는 그런 관계에 대해 조명해 보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우리 사회에 그런 관계가 많잖아. 회사 상사와 부하, 군대 선임과 후임, 기자도 사수가 있다며. 그 명제를 생각하고 어떤 관계가 가능할지 생각했다. 연출가와 조연출, 감독과 배우, 남매 등 여러가지 관계를 설정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자매와 형부로 모아졌는데 그러고 나니 통속적이라는 우려가 들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 (넓은 의미에서의)멜로 드라마니까 통속적인 관계도 괜찮겠다 싶었다.

-개인적 관계의 이야기를 하면서 ‘철거’같은 사회적 소재를 끌어들인 이유는 뭔가.

“그것도 비슷한데, 이런 생각을 했다. B는 A를 떠났다 돌아오고, A는 다시 받아준다. 이게 반복되다 결국 B는 영영 떠난다. 마지막 떠날 땐 A라는 사람, A가 속한 집단의 대의를 아예 망쳐놓고 떠난다. 꼭 망치려고 했던 건 아닌데 말이다. 그런 일도 빈번하거든. 먼저 이 매커니즘을 정하고 그 뒤에 어떤 집단을 대상으로 할까 고민하다 철거 현장을 정했다. 철거로 정하고 그 뒤에 공부도 하고 현장도 많이 다녔다.

-주인공의 트라우마로 ‘화상’을 설정한 특별한 이유가 있었나. 이번엔 유난히 불이 많이 쓰였다는 느낌이 드는데.

“음 생각을 해보니, 시나리오 쓸 때 자기 무의식이 들어간다. 내 몸에 화상이 있다. 얼굴하고 무릎에, 그 화상을 입었던 순간의 기억들이 작용했겠지”

-당신 말대로 ‘관계’를 조명한 영화라면 왜 제목은 ‘파주’라는 공간으로 정했나

“시나리오를 쓸 때는 개념적인 것 말고 정서적인 부분도 많이 작용한다. 나는 막연히 ‘배경이 안개가 많이 피는 도시였으면 좋겠다. 꿈처럼 여러가지가 섞여 버리는 곳이면 좋겠어’라고 생각했다. 실제 파주에 갔을 때 안개가 자욱해서 한 치 앞이 안 보이고, 한 발짝도 나갈 수 없었던 그런 경험이 있어서 파주를 배경으로 했다. 사실 (웃음)2005년 부산국제영화제 ‘부산프로모션플랜(PPP)’에 작품을 낼 때 제목이 없었는데 영화제에서 ‘파주’로 하자고 해서 그냥 ‘파주’가 됐다. 사실 편집되긴 했는데 영화 마지막 부분에 파주에 대한 언급이 있었다. 이 부분이 빠지면서 제목을 계속 ‘파주’로 할까 고민도 했지만, 누군가 떠났다 돌아오는 그런 장소를 명명해줘도 괜찮겠다 싶었다”

-이선균, 서우 선택한 이유는 뭔가

“일단 이선균씨는 신뢰감을 주는 배우다. 연기자가 되기 위한 과정들을 착실히 밟아온 사람이라는 데 대한 믿음이다. 극 중 중식은 누군가를 좋아하는 것도, 불운한 일도, 오래 마음에 담는 인물이다. 골이 깊고 질척한 성격인데 경험의 폭은 큰 사람이지. 어떤 배우는 이 역을 격정적으로 표현할 수도 있겠지만 난 그것도 싫고, 또 너무 가벼운 것도 싫었다. 이선균은 중용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서우양은, 사실 중학생부터 20대 초반까지를 소화할 수 있는 배우의 폭이 워낙 좁기도 했고, 그런 배우들을 떠올리다가 서우가 제일 좋다고 생각했다. 일단 얼굴이 많이 알려져 있지 않은 상태였으니까. 물론 그런 외적 조건말고도 서우는 배우로서 강한 본능과 근성이라는 미덕이 있다.”

-이번에 상 받았는데, 소감은

“나이가 차는 걸 느껴서인 것만은 아닌데, 뭔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이번엔 정말 새로 시작하는 마음으로 열심히 착실하게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위도식이 나쁜 게 아니라고, 그건 고군분투만큼 좋은 거라고 생각하고 살았는데, 이젠 반대로 사는 것도 좋겠다 싶었다. ‘7년 만에 영화 만들었다’는 말에 대한 염증일 수도 있고 아니면 다른 영화 생각이 있어선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열심히 영화를 만들어야겠다”다.

말을 하기 싫어하는 성격이라고 짐작했다. 하지만 대답은 그 어떤 인터뷰이보다 친절했다. ‘이거다’라고 딱 짚어주진 않았지만 아주 상세히 자신의 ‘의식의 흐름’을 설명했다. 얘기를 하다 그는 갑자기 마치 웃겨 죽겠다는 듯 목을 뒤로 젖히며 ‘껄껄껄’하고 웃는 습관이 있었다. 그가 웃는 타이밍을 전부 이해할 순 없었지만 그 웃음소리 하나는 참 시원하고 깨끗했다.

영화 ‘파주’는

최은모(서우)의 언니 은수(심이영)는 서울에서 학생운동을 하다 파주에 내려온 김중식(이선균)과 결혼한다. 은모가 돈을 벌겠다며 가출한 사이 언니는 사고로 죽고, 돌아온 은모는 중식과 함께 살게 된다. 시간이 흘러 은모는 중식에 대해 묘한 감정을 갇게 되고, 그를 떠난다. 3년 만에 돌아온 파주에서 중식은 변함없이 은모를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언니의 죽음에 대해 의문을 갖게된 은모는 중식을 향한 마음을 억누르고자 더 진실을 찾는데 매달린다. 철거와 재개발, 언니의 죽음 등 영화 속 모든 장치는 결국 '중식과 은모의 관계'라는 정점을 향한 연결고리다. 29일 개봉. 글·사진 국민일보 쿠키뉴스 양지선 기자
dybsun@kmib.co.kr 기사모아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