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정희의 시사소설 '조선500년 익스트림'] 조직폭력배, 내란음모 진보당이 되다

기사승인 2013-09-05 11:32:01
- + 인쇄
[전정희의 시사소설  '조선500년 익스트림'] 조직폭력배, 내란음모 진보당이 되다

[친절한 쿡기자 - 전정희의 시사소설 ‘조선500년 익스트림’]

“내란음모 수괴를 압송했다 하는데 왜 조정이 이렇게 시끄럽습니까? 역모 꾀한 자들의 계보가 드러났습니까? 공표하시지 그러세요.”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는 비변사 당상 김춘기를 다그쳤다. 내란의 수괴를 잡아 공안정국을 형성했으나 소론(야당)은 물론 삼사(三司)의 반발이 만만찮았다. 소론, 소북, 남인이 반발이야 당연한 것이었으나 비변사와 함께 군무를 담당하는 형조의 보이지 않는 공세가 거셌다.

“비변사가 설쳐 뭔가 대단한 일이 터졌구나 싶었지. ‘이인좌의 난’ 정도는 되는 줄 알았어. 한데 공소 유지가 어려울 정도야? 우리가 나섰어도 그보다 잘하겠다.”

형법을 누구보다 잘 아는 형조 관원들은 비변사의 어수룩한 대처를 힐난했다.

김춘기가 사도세자와 좌당을 잡기 위해 노린 꼼수는 세자의 역모 고변이었다. 그런데 그 방식이 하수였다. 좌참판 윤급의 사노비 나경언을 시켜 ‘세자 비행 10조목’을 적은 봉서를 임금께 올린 것이다. 무식한 나경언은 그것이 무고일 경우 참수된다는 것도 모른 채 천방지축 놀아났다. 나경언은 사노비이긴 하나 딴집살이하는 노비로 그 하는 행색이 살략계(조직폭력배)와 진배없었다.

조직폭력배, 진보당이 된 이유

정순왕후는 열다섯 나이에 예순여섯의 영조의 정비가 됐다. 무려 쉰한 살의 나이 차이였다. 며느리 혜경궁 홍씨보다 열 살 아래였고, 훗날 정조가 되는 손자보다 일곱 살 위였다. 정순왕후의 아버지 김한구는 골수 보수로 명나라라면 명자만 봐도 벌떡 일어나 머리를 박을 정도였다. 김춘기는 정순왕후의 고종사촌 오빠였다.

이런 그들이 소론을 지지하는 사도세자를 좋아할 리 없었다. 김춘기는 김한구가 천거하고 정순왕후가 조정 심복으로 삼기 위해 뒤에서 밀었다. 이런 사정을 아는 사도세자는 그를 견제했으나 나이 어린 어머니 정순왕후 때문에 어찌해 볼 수가 없었다.

김춘기는 어떻게든 사도세자를 제거해야 했다. 어의가 영조의 진맥을 마치고 나올 때마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기 때문이다. 영조는 내년이면 칠순이었다. 영조가 죽고 사도세자가 집권한다면 홍계희 이해중 홍봉한 윤급 등 노론 대신은 사문멸족이 될 것이 뻔했다.

나경언 사건, 합정방 회합은 국가반란

김춘기가 나경언 고변 봉서를 영조에게 내밀었을 때 앞뒤 안 맞는 얘기로 그를 당황하게 했다.

“세자 이놈이 정신이 오락가락 해도 유분수지. 합정방 음모와 나주객사 벽서 사건을 세자가 주동했단 말이냐? 나경언이란 놈의 고변이 사실이냐? 이런 쳐 죽일 놈들. 당장 죄다 잡아 들여 추국하도록 하라!”

김춘기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나주객사에 ‘조정에 간신들이 가득해 백성의 삶이 도탄에 빠졌다’는 벽서가 붙었던 것이 이태 전이었다. 그 수괴는 이인좌의 난과 연루되어 유배를 간 윤지로 파악됐다. 이때 김춘기는 관련자들을 죄다 잡아들여 공안통으로 명성을 떨쳤다. 비변사 주도 1차 공안정국이었다.

윤지를 따르던 수백 명의 무리는 “우리에게 갑진년 이후 임금은 없다”며 저항하다 형장에서 이슬로 사라졌다. 갑진년에 영조가 즉위했는데 영조가 경종을 독살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영조가 탕평책을 거두고 노론 독주를 만들게 한 것도 이 사건이 계기가 됐다.

그런데 그 나주벽서사건과 합정방 음모에 세자가 관련됐다니…. 영조는 믿을 놈이 없다고 생각했다.

집권자의 광기, 2인자의 정신병

형조, 사헌부 등에서 공안통으로 잔뼈가 굵었던 김춘기는 자신의 뜻대로 풀려나가자 쾌재를 불렀다. 한데 봉서 보고를 마치고 어전에서 물러나다가 봉변을 당했다. 영조가 매화틀(이동용 좌식 변기)을 김춘기에게 던진 것이다. 매화틀에서 흘러내린 똥물이 김춘기의 입으로 스며들었다.

“야 이놈아, 내가 안 죽였다. 나 아직 죽을 때 안됐어!”

영조는 김춘기를 저승사자로 봤는지 선왕 경종을 독살하지 않았다고 소리쳤다.

영조의 이러한 광기는 고스란히 대리청정하던 세자에게 쏟아지곤 했다. 아버지의 광기가 무서웠던 세자는 어느 날 훌쩍 궁궐을 떠나 평양 등을 유람해 조정을 발칵 뒤집어 놓기도 했다.

세자 또한 아버지의 영향 때문이지 여승을 궁궐에 입궐시키고, 수하를 시켜 시전 상인의 잡화를 무단으로 빼앗는 상식 밖의 사고를 쳤다. 정순왕후와 노론 신료들은 격간도동(정신병)이라며 세자로 부적합하다고 상소했다.

합정방 회합 참석자 중 배신자는 누구?

합정방 내란음모 사건을 고변한 나경언은 도성 살략계에 속해 온갖 패악질을 일삼았다. 용호영 악대 패두(요즘으로 치자면 연예기획사 대표)를 윽박질러 기생 몸상납을 받고, 그 중 빼어난 미모의 기생은 별도로 뽑아 비변사 관리들에게 상납했다.


그가 눈을 부라리며 협박을 할 때면 도성 백성이 벌벌 떨었다.

“네 머리통은 구리로 되어 있고, 집을 물로 지었나? 우리 패거리 수백 명이 성안에 흩어져 돌아다니면 순라군도 묻지 않는다.”

이 살략계 패거리 130여명이 지난 오월 열이튼날 도성 밖 합정방에서 회합을 가졌다.

김춘기는 이때다 싶었다. 낭청을 시켜 나경언을 잡아들이도록 명했다. 포박되어온 나경언은 영문을 몰라 눈만 뻐끔뻐끔하고 있었다.

“당상 어른, 제가 무슨 죄가 있다고 이러십니까? 아시다시피 제 수하시켜 비변사 서리, 청직 등에게 세작 역할 충실히 했습니다. 형조가 잡아들여야할 왈패들, 저희들이 힘써 비변사 공으로 돌렸습니다. 그뿐입니까? 비변사 도제(상임위원 격)치고 저희 살략계 여인네 몸정 안받아 본 나리들이 누가 있습니까?”

나경언은 당당했다.

“이 놈이 권력 무서운 줄 모르는구나. 우리가 네 패악을 모르고 이러는 줄 아느냐? 알고도 모르는 척 해주었을 뿐이다. 부녀자 겁간, 과부 보쌈, 왕십리 채소시장(이현) 이권개입, 이조 난입 공무방해 등 50여 건에 이른다. 특히 네놈, 수원유수 마님과 정 통하고 있는 것 다 알고 있다. 수원유수가 도성에 없자 도둑고양이처럼 유수집 담을 넘어 마님 겁간한 거 다 안다. 이래도 나불거릴 테냐? 화간이든 어쨌든 양반집 마님 건드렸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육시를 당할 죄목이다.”

나경언의 태도를 그때부터 달라져 머리를 조아리기 시작했다.

“우리가 시키는 데로 하여라. 그러면 살 것이다. 너희 살략계가 합정방에서 가진 회합은 역모다. 사도세자 끄나풀들과 연결되어 있어. 칼과 창을 들고 도성 양반을 도륙내자고 결의하지 않았더냐? 네가 모주이지 않았느냐?”

“아이고 모주라뇨 나리, 그 무슨 천부당만부당한 말씀이오니까? 역모라뇨?”

김춘기는 벌떡 일어서더니 나경언의 뺨을 세차게 후려쳤다.

“이 새끼가 인간적으로 대우해줬더니 안되겠구나. 평생 원옥에서 썩고 싶으냐? 네 너를 위해 마지막으로 베푸는 것이니 받든 말든 맘대로 해라.”

그러면서 김춘기는 ‘세자 비행 10조’를 쓴 고발장을 나경언에게 내밀었다.

“지장 찍어라. 합정방 회합은 세자 수하들이 시켜 역모를 꾀한 것이다. 네가 그 회합의 모주였을 뿐 좌장이 아니라는 건 안다. 빼 줄 테니 협조해라. 그러면 너는 살 것이다.”

공안정국, 집권당의 꽃놀이패

결국 나경언의 봉서는 2차 공안정국을 불렀다. 세자가 억울하다며 궁관을 시켜 나경언의 배후를 캐자 어수룩한 나경언이 비변사 김춘기가 시킨 것이라고 자백했다. 그러나 영조는 이를 믿지 아니하고 문안조차 받지 않았다. 세자는 매일 시민당에 나가 거적을 깔고 영조에게 석고대죄하며 노여움을 풀라고 했으나 요지부동이었다.

그 무렵, 김춘기는 정국이 자신의 밑그림대로 풀려나가자 ‘살략계 내란음모 적발’을 발표하고 세자 측근과 소론, 남인 등을 제거해 나갔다. 계보도 하나 없는데도 밀어부쳤다. 영조에 의한 사도세자 뒤주 살해 그림자는 그렇게 다가오고 있었다. 국민일보 쿠키뉴스 전정희 기자·시사소설 작가 jhjeon@kmib.co.kr 기사모아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