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번방은 디지털 성범죄 종착지 아니다”

/ 기사승인 : 2020-05-23 03: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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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가 바라본 n번방의 오늘과 내일

[쿠키뉴스] 한성주 기자 = “n번방이 전례 없던 특이한 사건은 아니다.

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이하 한사성) 활동가들의 말이다. 22일 서울여성플라자에서 만난 한사성의 승진, 신성연이 활동가는 법률, 수사기관, 인터넷 사업자, 디지털 공간에 참여하는 개인 모두가 변화하지 않는다면 디지털 성범죄를 근절할 수 없다며 이 같이 밝혔다.  

n번방·박사방 사건은 디지털 공간에서 발생한 조직적 성착취 범죄다. 가해자들은 해외 서버를 사용하는 익명 메신저 텔레그램을 활용해 미성년자를 포함한 여성들을 상대로 성착취 영상을 촬영하도록 협박했다. 피해자들의 영상은 대대적으로 공유·판매됐으며, 오프라인 공간의 성폭력 범죄로 이어지기도 했다. 

참고로 한사성은 디지털 성폭력 대응 최전선에 나선 비영리 민간 단체다. 지난 2017년도에 출범한 한사성의 미션은 온라인 공간에서 자행되는 성폭력을 근절하는 것이다. 한사성은 관련 법 개정을 촉구하고, 디지털 성범죄 인식개선 교육도 하고 있지만, 활동의 최우선에 두는 것은 바로 피해자 지원이다. 이날 만난 활동가들은 n번방 가해자들에 대해 “피해자를 장난감처럼 대했다”며 분개했다.  

- n번방 사건을 보면서 어떤 생각이 들던가. 

위계사회에서 약자를 희화화 하고 괴롭히는 행위는 강자의 특권이자 놀이가 된다. 여성혐오를 즐기는 커뮤니티가 형성되고, 그 속에서 여성에 대한 학대가 하나의 놀이문화로 자리 잡은 것이 바로 n번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해 텔레그램에 한국 국적의 사용자가 급증했을 시기에 이른바 ‘남초 커뮤니티’에서는 n번방에 대한 정보가 공유됐다. 이를 센터 측에서 모니터링하며 ‘밈’(meme)이 생성되는 현상을 발견할 수 있었다. 밈은 특정 집단 내에서 서로가 서로의 행동을 복사해 공유하고, 이를 놀잇감 삼아 집단의 결속력을 강화하는 것을 말한다. n번방에서도 가해자들은 피해영상물과 피해자를 지칭하는 단어를 장난감처럼 활용했다.

- 그동안 유사한 범죄 수법이 적지 않았다는 분석도 있는데. 

기술의 발전과 함께 범죄 수법도 변화하고 더 치밀해진다. 그러나 n번방은 어느 날 갑자기 출몰한 새로운 유형이 아닌, 이전부터 상존했던 범죄다. 컴퓨터의 상용화 전에도 비디오를 통해 불법촬영물이 제작·공유됐다. ‘몰카’로 불리는 카메라이용성범죄 규탄 운동이 시작된 시기는 지난 1997년이다. 당시 신촌 그레이스백화점 여자화장실에 불법 설치돼 있던 초소형카메라가 발견되면서다. 비디오, PC통신, 인터넷을 전전하던 디지털 성범죄자들의 가장 최근 집결지가 텔레그램이 됐을 뿐이다.

- 여성가족부와 법무부, 국회가 n번방 소탕에 꽤 적극적인 것 같다.

노력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지만, 부족한 부분이 많다고 느껴진다. 자화자찬하고 있다는 느낌도 든다. 디지털 성범죄를 비롯해 여성 대상 성범죄 문제에 대해 정부 부처와 수사기관이 여성계의 목소리를 적극적으로 수렴해야 한다. 여태까지 여성계 의견은 ‘들으면 좋고 안 들으면 그만인 말’ 취급을 받았다. 그러니 수사기관과 관계부처들은 여성 대상 성범죄에 대해 가장 보수적이고 느린 조직으로 뒤처질 수밖에 없다. 이들 기관이 귀를 열지 않는다면 조직의 성인지 감수성을 기를 경로도 확보할 수 없지 않겠나.

- 그럼에도 왜 n번방을 사전에 막지 못했을까. 

그동안 디지털 공간에 여성혐오가 팽배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인터넷에서는 특정 존재를 업신여기는 방법이 무엇인지 아무런 경각심 없이 공유된다. 비슷한 생각을 가진 이들이 커뮤니티를 형성하기도 쉽다. 사진·영상 등 콘텐츠가 어떤 제약도 없이 재생산된다. n번방 가해자들의 나이대를 보면 대부분 90년대생이다. 인터넷 공간에 매우 익숙한 세대라는 사실과 이들의 범행이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 최근 n번방 가해자들이 속속 검거되고 있다. 중요한 것은 이후 어떤 조치가 취해지느냐 일텐데.

온라인 사업자의 책임 강화가 제대로 이뤄지는지 지켜봐야 한다. 이들에게는 필터링, 삭제, 수사협조 등의 의무가 강력히 부과돼야 한다. 최근 국회를 통과한 전기통신사업법을 반대한 이들이 내세운 근거는 ‘표현의 자유’였다. 범죄를 방치하는 행위가 어떻게 자유라는 가치로 보호받을 수 있는지 되묻고 싶다. 혹자들은 포털의 ‘자체적 노력’이 이뤄지고 있어, 법적 규제를 도입하는 것은 과하다는 주장도 나온다. 연관검색어를 통한 2차가해가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데, 대체 뭘 자체적으로 노력했다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 디지털 성범죄를 제대로 개선하려면 어떤 것이 가장 선행돼야 할까.

소비에 대한 처벌이 필요하다. 디지털 성범죄는 소비로 완성되는 범죄다. 조주빈을 잡아 처벌한다고 해서 n번방이 끝났다고 생각하는 것은 큰 착각이다. 사회에는 계속해서 불법영상물을 보고싶어 하는 사람들이 있지 않은가. 이들이 있는 한 디지털 성범죄는 사라지지 않는다. 디지털 성범죄 모의·가담 행위를 한 사람도 적극적으로 처벌해야 하는 이유다. 범행을 ‘저지른’ 사람들 뿐 아니라, ‘저지르도록 일조한’ 사람들도 공범으로 규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n번방과 텔레그램은 디지털 성범죄의 종착지가 아니다. 소비에 대한 처벌이 없다면, 범죄자들이 모여드는 플랫폼은 계속해서 이동·확장될 것이다.

castleowner@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