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정희의 시사소설] 청와대, 민주 귀태 괴담에 태모필(胎母筆) 사용금지…필방 된서리 맞아

기사승인 2013-07-15 13:2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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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절한 쿡기자 - 전정희의 시사소설 '조선500년 익스트림'] 세조는 분을 참지 못해 내관을 불렀다.

“홍민주(洪民主)라는 자가 어떤 자냐?”

내관 허고성은 머리를 조아리고 말했다.

“성균관 직강(直講)이온데 여진(女眞)을 다루는 방도가 능해 직강의 벼슬까지 오른 줄 압니다. 상재생(上齋生·생원시와 진사시 합격 유생)들에게 덕망 받고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덕망? 덕망이라 했더냐?”

세조는 허고성의 얘기에 부르르 주먹을 쥐더니 손에 잡고 있던 태모필(胎毛筆)을 냅다 집어 던졌다. 날아간 태모필은 내관 왼쪽 눈을 때리고 침전 바닥에 떨어졌다. 한데 공교롭게도 붓끝의 먹물이 원심력으로 용안 눈초리에 튀었다. 늘 입을 굳게 다물어 말붙이기 어려운 용안은 더 세보였다. 날아가는 봉황도 겁을 먹고 내려앉을 지경의 사천왕상이었다.

내관이 급하게 엎드렸다.

“전하, 죽여주시옵소서.”

엎드린 내관 코앞에는 태모필이 떨어져 있었다. 그가 어전 마루바닥에 코를 깊이 박은지라 붓이 인중에 닿았다. 내관은 홍민주에 대해 묻는 세조의 밀의를 그제야 알아차렸다.

내관은 인중에 먹이 묻은 것도 모른 채 고개를 살짝 들어 “죽여 주시옵소서”를 연발했다. 잘못했다는 것을 제발 알아달라는 듯 뿌리 없는 엉덩이를 다른 어느 때보다 높이 올렸다.

세조의 독기는 그날 칼을 빼어들 기세였다.

귀태? 귀태 망언을 보고 받은 세조는 태모필을 집어 던졌다

화를 면한 내관은 간신히 침전을 물러나 대언(代言) 도승지 이곡성에게 용상에서의 일을 아뢨다. 이곡성은 얘기를 듣자 얼굴이 하얘지더니 부랴부랴 선정전을 나갔다. 그리고 밀지를 내려 만조백관을 불러 모았다.

“홍민주란 자는 전하를 능멸한 자올시다. 그가 초이튿날 유생 강론에서 ‘귀태(鬼胎) 권력이 나라를 말아 먹으려 한다’고 했다는 데 이는 누구를 지칭하는 것입니까? 바로 전하를 지칭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 백악한 자가 성균관 직강이라는 것이 말이 됩니까? 능지처참하지 않으면 열조가 능멸을 당할 것입니다.”

귀태 사화, 피의 살륙이 발생한지 한 달도 안돼 일어나다

이른바 ‘귀태사화’였다. 1451년 6월 1일 성삼문과 박팽년이 중심이 된 단종 복위 역모로 피의 살육을 한지가 한달도 지나지 않은 때였다. 단종 복위 역모로 승정원 승지 성삼문은 체포 되어 팔이 잘리는 고문을 당한 끝에 숨졌다. 팔이 잘린 상황에서도 세조를 임금으로 칭하지 않고 ‘나으리’라고 불렀다. 박팽년, 유응부, 이개 등은 작형(灼刑·단근질) 후 사지가 찢기는 거열형으로 죽었다.

이런 일련의 살육으로 세조는 악몽에 시달리고 있었다. 집권 과정에서 한명회를 통해 살생부를 작성, 입궐 대신들을 족족 쳐 죽인 데다 왕권에 위협이 될 형 안평대군과 동생 금성대군도 유배를 보낸 상태였다. 그 둘도 죽일 시기만 보던 세조였다.

그러나 아버지 세종이 세조에게 밤마다 나타나 ‘그러면 안 되느니라. 더는 피를 보지 말거라’하였다. 그래서 안평과 금성의 척살을 미루고 있었다. 세조는 몇날 며칠 침전 보료를 식은땀으로 적시곤 했다.

세조는 원래 진양대군이었다. 그러나 세종은 둘째 아들 진양대군의 거침없는 욕망을 감지하고 수양대군이라 고쳐 불렀다. 수양산에서 절개를 지키다 굶어 죽은 백이·숙제처럼 차남(次男)의 본분을 알고 살아가란 뜻이었다.

하지만 수양은 조카 단종이 왕위에 오른 1년, 계유정난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했다. 장남인 형님 문종은 죽으면서 어린 단종의 앞날이 염려됐던지 원로대신 김종서, 황보인 등에게 단종을 부탁했다. 수양은 계유정난에서 그들을 곧바로 척살시켰다. 피의 군주였던 것이다.

명분 없는 단종 폐위, 태모필 쥐고 태어난 사대부들 칼을 쥐다

명분도 없는 단종 폐위에 민심은 요동쳤다.

“태모가 있을 정도로 어리신 열두 살 군주를 삼촌이란 자가 칼로 짓누른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강상의 법도는 그런가? 우리에겐 효가 으뜸임을 가르치면서 어찌 제 형제를 사지에 몰아넣는단 말인가?”

“수강궁(창경궁 전신)에 계신 단종 임금을 그냥 두겠나? 해가 도성 내에 두 개가 있으니 수양과 족제비 같은 한명회가 단종을 달빛 구경이나 하라고 그냥 놔 두겠나 말 임세. 아무리 배다른 어미 밑이라고는 하나 부모가 태모필(胎母筆) 내린 자들 아니가. 백성을 보살피라고 태어난 대군들의 배냇머리 잘라 만든 게 태모필 아닌가 말일세. 그런데 그걸 칼로 빚어 제 형제에게 겨누다니 쯧…말세로세. 귀태가 꼭 틀린 얘기는 아녀.”

귀태 사화로 필모장 판로 막혀 "귀태 땜에 굶어 죽게 생겼네"

그 무렵 안성현 아가모 고을 필방 우무치는 양반들이 가장 많이 찾는 태모필이 갑자기 팔리지 않아 생계가 막막해 걱정이 태산이었다. 필장(붓장인)에게 태모필 제작의 핵심인 물끝보기를 15년 만에 겨우 익혀 필장을 넘어서는 실력을 갖추게 됐는데 하루아침에 너도 나도 태모필이 필요 없다며 내쳤기 때문이다.

“이보게 무치. 우리도 어쩔 수 없네. 현감 어른께서 태모필은 모조리 갖다 버리라며 대소 관계
없이 불 싸질렀네. 동헌 내아전, 외아전 할 것 없이 태모필 사용 금지야. 안성향교 유생들도 태모필을 부러뜨리네. 극한 자들은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만든 태모필조차도 ‘홍민주필’이라며 갖다 버리네. 사실상 어명이네.”

우무치는 터덜터덜 관아를 걸어 나왔다. 관아에 납품하려던 괴나리봇짐을 풀어보지도 못하고 지고 나오는 중이었다.

“허, 살다가 살다가 제 부모가 자식 위해 챙겨준 태모필을 버리는 해괴한 일을 겪다니…아니 임금께서는 왜 태모필 사용금지령을 내린 것이여. 우리 같이 붓 팔아먹고 사는 놈들은 어쩌라고. 성균관 먹물쟁이 홍민주라는 놈도 그렇지. 귀태건 뭐건 간에 제 부모 욕하는 걸 누가 좋아할 리 있겄나 말여. 더구나 용상 향해 그런 썩어 빠질 얘기하고 있으니 화가 날 법도 혀.

속이 상해 길가의 붉은 목단 모가지를 댕강 쥐어뜯어 버린 우무치는 혼잣말처럼 중얼 거렸다.

“그렇다고 임금이 되가지고 속 좁게 태모필을 갖다 버릴 건 뭐여. 사용 금지는 뭐냔 말여. 우리 자식새끼들 귀태 땜에 굶겨 죽이게 생겼네.”

"귀태고 뭐고 삼시 세끼 걱정 없이 살게 해주오"

태모필은 백일이나 돌 지난 아이의 배냇머리로 만든다. 우무치도 두 자녀의 배냇머리를 정화수 놓고 깎아 정성을 다해 태모필을 만들어 두었다. 이 아이들이 자라 글을 쓸 줄 안다면 자신과 같은 천한 모필장으로 살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다.

사대부 집안이라면 누구나 태모필을 만들어 보관했다. 태모필은 다른 어느 붓보다 서체가 부드러웠다. 양민이나 노비 자제가 태어나면 우무치 같은 필모장이 그들의 배냇머리를 사서 한양과 현청 등에 내다 팔았다. 그 붓으로 사대부 자제들은 사자소학을 익혔다. 사대부는 결코 귀태가 아니었다. 귀태는 아가모 골에 사는 농투성이나 갖바치, 백정 등이었다.

한데 태모필로 사자소학을 익힌 그들은 태모 나이를 벗어나면 붓보다 칼을 더 좋아했다. 어디까지나 양반네들의 삶이기도 했다. 백성은 임금이 문치(文治)로 삼시세끼 걱정 없이 살게 해주었으면 하고 바랬다.

어쨌거나 우무치는 아가모 필방을 유지나 할 수 있을지 걱정됐다. 임금이 한마디 한건데 말을 거둬들이기도 어려워 보였다.

한편 백성들 사이엔 대신들 가운데 입 있는 자가 없다며 수군거렸다. 칼을 써본 본 임금은 누구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세조는 오직 칼만 믿었다. 그러니 누구 하나 나서려는 위인이 없었다.

“망조네. 말이 막히면 글이 막히고, 글이 막히면 길이 막히고, 길이 막히면 사람이 막히는데…그러면 이 많은 태모필은 어쩌냔 말여. 귀태가 사람 잡는 귀신일세 글여.”

우무치는 그해 7월 장맛비를 흠뻑 맞으며 집으로 향했다. 더 무거워진 괴나리봇짐을 낑낑거려 지고 다시 아가모 고을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국민일보 쿠키뉴스 전정희 기자·시사소설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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