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정희의 스몰토크] "고객님 당황하셨어요?"…개콘 '황해' 폐지 압박은 안된다"

기사승인 2013-06-03 17:01:01
- + 인쇄

[친절한 쿡기자 - 전정희의 스몰토크] “고객님 당황하셨어요?”( KBS2 TV 개그콘서트 코너 ‘황해’)

지극히 서민적인 코미디 ‘황해’가 단 2회 방영으로 미디어를 장악했다. 연변에 사는 중국동포(조선족)를 소재로 한 범죄 영화 ‘황해’를 패러디한 코너가 바로 ‘황해’다. 지난 5월 26일 첫방영에 이어 2일 2회가 나갔는데 “고객님 당황하셨어요?”라는 유행어를 만들며 단박에 화제가 됐다.

시청률조사기관 TNS가 2일 개콘 코너별 시청률을 조사한 결과 ‘황해’가 17.7%를 기록, 1위를 차지했다. 시청자 및 네티즌은 “정말 리얼하다” “이 코너 덕에 개콘 볼 맛이 난다” 등의 반응을 보이고 있다. 출연 개그맨 이상구 이수지 신윤승 정찬민은 하루아침에 스타가 됐다. 당연히 2일 인터넷 검색 순위 1위에 올랐다.

황해는 보이스피싱을 패러디했다. 조선족 사투리를 구사하는 범죄 조직원들이 주어진 매뉴얼에 따라 전화를 걸어 보이스피싱을 시도하는 내용이다.

고참 여직원(이수지 분)이 신참(정찬민)에게 “이거이 잘해야 밥 빌어먹고 살 수 있다. 모르면 보고 읽으면 된다”하고 실습을 시킨다. 신참은 전화를 받은 고객(?)의 말을 잘 알아들을 수 없으면 “고객님, 당황하셨어요?”라는 말을 연발하는데 바로 이 지점에서 폭소가 터진다.

고객이 “저 신용카드 없는데요. 교통카드 밖에 없어요.”라고 하면 “교통카드에서 3000만원이 인출되셨습니다. 3000만원 충전된 거 보고 저도 많이 놀랐습니다”라는 식이다. 아무튼 어설픈 사기꾼들의 흉내를 천연덕스럽게 잘도 소화해 낸다.

“교통카드 3000만원 충전된 거 보고 저도 많이 놀랐습니다”

사실 보이스피싱을 소재로 한 코미디가 왜 이제야 히트를 하나 하는 감도 없잖다. 십수 년 된 보이스피싱 사기로 정말 너무나 많은 사람이 고통을 당했고, 선량하게 살아가는 조선족의 이미지만 나빠졌던 것이 사실이다.

한데 제작자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위험하기 짝이 없는 소재다. 일제강점기라는 불행한 시기 간도를 떠돌아야 했던 할아버지 또는 증조할아버지의 후대를 비하할 수 있다는 어려움이 있었다. 또 조선족 대개는 중국 국적이어서 외교적 분쟁을 일으킬 수 있다.

무엇보다 이 땅에서, 또는 중국에서 건실하게 살아가는 동포에게 상처 줄 우려가 있다는 점이 소재로 삼기 쉽지 않았다. 아웃사이더를 놀리는 것은 비열한 짓이다. 이 어려움을 개콘 제작진이 알찬 내용으로 극복했다. 그리고 성공적으로 안착했다.

보이스피싱 사기는 누구나 직·간접적으로 당한 터라 울림도 넓다. 그래서 시청자와 네티즌은 열화와 같은 박수로 화답했다. 다행이 보이스피싱에 학습효과가 생긴 시민이 더는 속지 않을 만큼 된 시점이라 분노하며 시청할 단계는 지났다는 점도 작용했다. 제작 타이밍이 절묘하다.

제작진은 “조선족을 비하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으며 보이스피싱에 대한 경각심 차원에서 만든 코너일 뿐”이라고 해명했다. 집단을 거론 하는 건 그만큼 어렵다. 그래서 만만한 ‘거지’가 소재가 되기 쉽고 개콘에서의 ‘꽃거지’는 그래서 나왔다.


물론 이 프로그램에 대해 우려의 목소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조선족을 희화화한 듯해 불편했다” “조선족 비하 개그인가”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하는 게 아닐까”라는 네티즌의 반응도 있다. 적절한 지적이고 귀담아 들을 대목이기도 하다.

문제는 인기가 더해질수록 ‘압박’이 심해진다는 것이다. 비윤리적이지도 않고, 폭력적이지도 않고, 선정적이지도 않은데 경직된 사회가 이를 용납하지 않을 수 있다. 시청자의 뜻이라기보다 외교·정치 등의 사회적 이슈와 맞물려 조기 종영 처지에 놓일 수 있다.

두 번째는 소재 고갈에 따른 압박이다. 보이스피싱이라는 한정된 디테일로 시작해서다. 치열하게 고민하고 다듬지 않으면 다른 어느 코너보다 수명이 짧을 수 있다.

미국 코미디 ‘골드버그 가족’의 유태인, ‘황해’의 조선족

1920년대 미국에선 “여보세요, 불∼루움 부인?”(1920년대 미국 라디오 코미디 ‘골드버그 가족’)이란 유행어가 대공황 직격탄을 맞은 서민을 위로했다. 가난한 유태인 가족을 처음으로 방송에 등장시킨 이 코미디는 라디오 멜로드라마의 시초가 됐고, 브로드웨이 무대에 올랐다. 책과 레코드, 영화로도 제작됐다. 50년대는 TV 시리즈물로 대성공을 거두었다.

유태인 문화에 익숙하지 않았던 미국민은 ‘골드버그 가족’을 통해 ‘야물커’라는 유태교 남자신도가 쓰는 두건을 알았으며, ‘체더’는 유태인 학교라는 사실을 배웠다.

처음에 이 코미디는 거친 욕설이가 비속어, 특이한 악센트로 청취자를 웃겼다. 당시 유태인은 미국내 아웃사이더였다. 하지만 이 프로의 인기가 높아지면서 제작진의 사회적 책임이 커졌고, 제작진은 공황 이후 서민의 역경 극복에 맞춰 새로운 버전으로 대응했다. 유태인 가정은 단지 역경 극복의 무대가 됐을 뿐 폄하의 대상은 아니었다. 그것이 ‘스테디셀러’가 된 이유다. ‘황해’라고 그러지 못하란 법 없다.

개콘에서 보여주는 조선족은 우리 민족의 부채다. 그들이 지금 우리 사회의 아웃사이더처럼 인식되어 희화화의 대상이 된다는 건 슬픈 일이다. 박경리 소설 ‘토지’에서 주인공 서희와 길상이 간도에서 본 사람들, 즉 일제강점기 궁핍을 벗어나고, 독립운동하기 위해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넜던 사람들의 후손이 오늘날 조선족이다.

‘황해’의 조선족, 우리 민족의 부채

그들은 오늘도 중국에서 소수민족으로 뛰어난 역량을 발휘하며 산다. 또 한국으로 들어와 힘든 제조업 등에 종사하며 오늘의 한국경제를 받쳐 준다. 조선족에 대한 혐오가 인터넷상에서 넘쳐 나고, 오원춘 사건과 같은 극악한 조선족 하나가 우리를 슬프게 하지만 대개의 그들은 선량하게 살아가는 우리 사회의 서민일 뿐이다.

우리는 1960~80년대 미국 로스앤젤레스 등에서 바로 조선족과 같은 삶을 살았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조선족의 스타일이, 외국인노동자의 스타일이 이해해야할 문화이지 촌스러운 것은 아니다. 따라서 프로그램 제작자가 아웃사이더를 소재로 삼을 때 충분한 이해로 따뜻한 마음을 담는다면 큰 반발을 부르지 않는다.

반면 제작진이 손에 쥔 것이 많은 집단을 소재 삼으면 전투력 없이 버티기 힘들다. 진정한 코미디는 바로 이들을 비틀 때 찰리 채플린과 같은 거장이 나온다.

국민일보 쿠키뉴스 전정희 선임기자 jhjeon@kmib.co.kr 기사모아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