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철수씨 부친 안영모 원장 부산 범천의원 48년 이야기

기사승인 2011-09-22 23: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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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철수씨 부친 안영모 원장 부산 범천의원 48년 이야기

바람이 몹시 부는 날이었다. 바닷가에서 불어온 듯 바람에선 ‘짠내’가 났다. 바람이 산 중턱에 놓인 보잘 것 없는 슬레이트집 사이를 지나다녔다. 사람 한 명 누우면 꽉 찰 만큼 작은 집들 벽마다 오래된 금이 전깃줄처럼 흘러내렸다.

이 산동네에서 내려오면 1970∼80년대 운동화, 메리야스, 스웨터를 만들던 ‘가정집 공장’이 4차선 도로 양쪽에 다닥다닥 붙어 있다. 전성기를 지나버린 부산 범천4동의 거리. 텅 빈 양복점 작업대에 멍하니 올라앉은 재단사의 표정은 심드렁하고, 평상에 삼삼오오 모인 사람들은 신세타령하며 한낮에 소주를 들이켠다. 세 집 건너 한 집마다 문이 잠겨 있다. 닫힌 문에는 세입자 모집 광고가 붙었다. ‘보증금 500만원에 월세 30만원.’

쇠락한 공장보다 더 낡아 보이는 병원이 이 거리의 중간에 있다. 생긴 지 48년 된 범천의원.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의 아버지 안영모(81) 원장이 운영하는 곳이다. 범천의원은 한때 산부인과, 외과, 내과, 소아과를 두루 진료하던 범천4동의 ‘종합병원’이었다. 지금은 환자가 하루 10∼20명에 불과하다. 문을 열자마자 할아버지 의사 한 명이 곧바로 눈에 들어온다. 원장실이 따로 없을 만큼 조그만 병원이다.

범천의원에 닥친 느닷없는 보건소 조사

서울대 의대를 졸업한 아버지 안 원장은 1963년 빈민촌에 병원을 열었다. 제대로 된 의료법이 제정되기 전까지 다른 병원 진료비의 절반만 받던 이 병원은 지금도 매일 오전 9시30분이면 문을 연다. 안 원장 가족은 약 20년 전까지 이 병원 3, 4층에서 생활했다.

안 원장이 약 40년 전 교통사고를 당한 신문배달 소년을 무료로 진료한 일화는 당시 지역 일간지에 보도되기도 했다. “어린 학생이 무슨 돈이 있겠느냐”며 병원 앞에서 사고 당한 소년을 치료 후 그냥 돌려보낸 것이다. “지식인의 사회적 책임에 대해 아버지와 대화를 하거나 직접 가르침을 받은 적은 없지만, 아버지의 생활을 보면서 자연스레 터득했다.” 안철수 원장은 2년 전 한 방송 프로그램에 출연해서 아버지에 대해 이렇게 회고했다.

그러나 기자가 찾아간 16일, 안영모 원장의 표정은 웬일인지 어두웠다. 듣고 보니 그날 부산 진구보건소 직원 2명이 국민건강보험법 위반이라며 조사를 나왔다는 것이다. ‘안 원장이 반값 진료비만 받으며 빈민을 치료하고 있다’는 내용이 모 언론에 보도되자 한 의료 종사자가 국민건강보험법 위반이라며 민원을 제기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언론사 보도는 오보였다. 건강보험법이 제정된 이후로 안 원장은 수가에 따라 적정 진료비를 받아왔다.

안철수 원장이 서울시장 후보로 거론된 직후 범천의원에는 수없이 많은 전화가 걸려온다고 한다. 아버지는 요즘 병원 전화기 코드를 뽑아 놓고 산다. ‘안철수 열풍’이 잠잠해질 때까지 외국이나 국내 조용한 곳에 칩거할까도 고민했지만, 늘 찾아오는 노인 환자들 때문에 병원 문을 도저히 닫을 수 없었다.

“자꾸 (기사가) 왜곡돼서. 제가 할 말이 없어요.” 별도의 원장실, 푹신하고 세련된 소파, 대형 LCD 텔레비전, 데스크톱 컴퓨터, 갖가지 여성잡지, 환한 조명과 벽지…. 어느 것 하나 없는 범천의원 안 원장과의 첫 만남은 그날 그렇게 끝났다.

범천4동의 ‘종합병원’

범천의원에 세 차례 더 찾아갔다. 환자가 없는 시간대에 5∼10분씩 이야기를 나눴다. “아이, 나 같은 평범한 사람이 무슨 기사가 된다고. 아프리카에 의료 봉사하러 가는 의사도 얼마나 많은데.” 안 원장은 매번 이렇게 말했다.

-서울이 아닌 부산 빈촌에 개원하셨네요.

“나랑 아내 고향이 부산이에요. 당시 의사는 부족하고 환자는 많은 탓인지 군대에서 3년 만에 제대를 안 시켜 줬어요. 어쩔 수 없이 군의관 생활을 7년6개월 했는데 마지막 2년은 밀양에 있었어요. 주로 결핵환자가 오는 곳인데 외과 파트에 있었죠. 밀양에서 부산 오는 기차 안에서 바깥을 봤는데 범천동이 눈에 들어오더라고요. 굉장히 낙후된 동네에 병원이 없는 것 같아 개원했어요.”

-대학 졸업하시던 시절에 의대가 전국에 4곳밖에 없었잖아요. 여기서 5분 거리인 번화가 서면에 개원했다면 수입이 더 좋았을 텐데요.

“몇 차례인가 갈까 망설였지요. 아, 그런데 환자들이 하루에 100명씩 몰려오니까 갈 엄두가 안 났어요. 그러다 이렇게 계속 있네요.”

주민들은 이 지역에 들어선 병원마다 운영난 탓인지 젊은 의사들이 계속 바뀐다고 했다. 범천의원과 비슷한 시기에 개원한 인근 성심의원 여의사는 최근 노병(老病) 때문에 문을 닫았고, 범천의원만 최장기간 이곳을 지키고 있다.

-범천4동에서 24시간 편의점 찾다 포기했어요.

“그렇죠. 예전에 여기 하꼬방(판잣집)이 참 많았어요. ‘가정 공업’하던 지역인데 점점 공업도 사양길로 들어섰고 교통, 학군이 안 좋아서 젊은 사람들이 떠나버렸어요. 주로 노인이 사는 동네죠. 인근 선암초등학교 한 해 신입생이 20∼30명 정도니. 우리 병원도 많이 낡았어요. 요즘 어디에 이런 병원이 있나요? 환자들도 다들 내과니 소아과니, 전문의한테 가잖아요.”

안 원장은 가정의학과 전문의다. 군의관 제대 후 개업해 40세에 의학 박사 학위를 따고, 50세에 가정의학과 전문의 자격증을 땄다. 그래도 병원 간판은 여전히 ‘범천의원’이다.

-전문의 자격증이 있으면 간판에 전문과목을 적잖아요. 그런데 간판은 왜 그대로죠?

“아이고, 종합병원 아니면 다 의원이죠. 간판이 중요한 것도 아니고, 나도 늙었고, 그냥 뭐 그대로 두는 거죠. 사실 ‘범천 가정의학과 의원’이라고 쓰는 게 맞긴 하죠. 공부를 계속한 이유는 갖출 건 갖춰야 하니까요. 의학 공부를 해 보면 정말 끝이 없거든요. 다양한 환자 분들을 치료해야 하니까 가정의학과를 택했고요.”

-부산에서 신발산업, 섬유산업이 잘될 때는 여직공들도 많이 왔겠네요?

“점심시간에 맞춰서 여직공들이 많이 왔지요. 기계 때문에 손가락을 다친 환자가 하루에 많으면 8명씩 왔어요. 손가락이 잘리거나 삔 직공들이 많이 왔어요. 일류 간호사 2명, 사무장 1명, 그리고 나 이렇게 4명이서 수술 많이 했죠. 뼈를 살살 깎아내서 접합 수술도 하고. 군의관으로 일할 때 외과의로 있으면서 별별 수술 많이 했던 경험이 있으니까. 나이가 들면서 수술도구며 분만도구 다 없앴어요. 지금은 간단한 것만 진료해요. 물리치료실이 없어서 물리치료 필요한 환자는 다른 병원에 보내고. 주사 한 방보다 물리치료가 효과적일 때가 있거든요.”

-점심때 끼니를 거르시고 환자를 받으시네요. 점심 때 진료하느라 생긴 버릇인가요?

“아뇨. 내 몸이 애비었잖아요(야위었잖아요). 체표면적이 넓어야 발산을 많이 할 텐데. 아침, 저녁만 먹어도 별로 배 안 고파요. 점심 때 주스 마시기도 하고.”

안 원장의 취미는 독서다. 병원에 나와 진료 시간 외에는 틈틈이 책을 읽는다.

-책 좋아하세요?

“소설도 좋아하고 두루두루 좋아해요. 추리소설도 참 재밌죠. 해방될 때 중학교 3학년이어서 일본말 할 줄 아는데 지금도 일본 가면 10권씩 책 사와요. 어린 시절부터 책을 좋아했는데 책만 잡으면 한 시간, 두 시간이 후딱 가잖아요. 우리 큰아들(안철수 원장)이 제가 책 읽는 거 보고 책을 많이 읽게 된 것 같아요.”

안 원장은 자신을 미화하는 법이 없다. 이곳에 개원한 이유는 “병원이 없어서”, 간판 안 바꾼 이유는 “그게 별로 안 중요해서”, 점심 때 환자 받는 이유는 “배가 고프지 않아서.” 늘 이런 식이다.

안 박사와 이웃들

“왔소?” “누워 보소.” “처방전 만들어 놨소.”

안 원장은 환자가 오면 이 세 마디와 문진(問診) 외에 크게 말이 없다. 환자들도 다른 병원과 좀 다르다. 보통 병원에선 간호사에게 접수부터 하는데 이마저도 이곳에선 생략이다. 병원 문 열자마자 털썩 안 원장 앞에 앉아 증상부터 말한다.

“어제 동동주랑 소주랑 섞어 마셨더니 머리가 고마 터질라 해요. 골이 띵하다니까요.” “(팔뚝을 쑥 내밀며) 일을 많이 해가 팔이 아파 죽겠쓰요.” 간호사가 환자의 얼굴을 알아보곤 묻지도 않고 알아서 종이 차트를 가지고 온다. 범천의원 박모(42·여) 간호사는 10년 이상, 사무장 이모(72)씨도 30년 이상 이곳에서 일했다. 의사, 환자는 수십년 봐 온 사이다.

주민들에게 범천의원에 대해 물었다. “아∼범천의원요? 알지요. 안 원장님요? 별 게 있겠십니꺼? 뭐 의사랑 환자 사이죠.” 범천4동 사람들은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그런데도 이들에겐 공통점이 하나 있었다. “아∼범천의원요?”라고 되물을 때, 다들 웃는다는 점이다. 이들에게 범천의원은 어떤 존재일까.

“돈이 없으니까, 아픈 사람이 더 많은 동네였어요. 원장님 옛날에 왕진도 많이 다니셨어요. 왕진료도 안 받고. 밤에 아프다고 문 두드리면 (진료하러 나오니) 자는 시간이 따로 어딨습니까?”(박정옥·대양부동산)

“요새 있는 사람들 쪼매만 돈 벌면 어깨 으쓱으쓱 한다 아입니까? 원장님은 안 그래요. 뭐라도 하나 주고 싶어서 찐 고구마 갖고 가면 ‘아이고 맛있겠네’ 이래 웃어준다 아입니까. 예전에 여기 사실 때 반상회 하러 원장님 댁에 가면 오래된 가구도 수리해서 쓰시데예. 서민적이라예.”(조정남·진미용실 )

“1200원 쏘주값도 벌벌 떠는 동네에 안 박사가 돈 벌러 지금도 나오겠소? 진료 받으면서 가정사 얘기도 할 수 있는 분이지. (안)철수가 착한 것도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나는 거랑 같은 기라.”(이근생·자영업)

“몇 년 전에 병원 갔더니 원장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데요. ‘갑자기 안 나오면 내가 저 세상 간 줄 아소.’ 범천의원 문 닫으면 진짜 이상할 것 같아요.”(문학수·송림반점)

안 원장은 지난해 2월 범천의원을 닫으려 했다. 함께 일하던 박 간호사가 육아 문제 등으로 잠시 퇴직을 고민하자 “환자 얘기만 들어도 처방전을 알 만큼 똑똑한 박 간호사 같은 사람 구하기 쉽지 않다. 신입을 데려오면 의료 서비스 질 저하도 우려되고, 3년을 가르쳐야 하는데 그러기엔 내가 나이가 들었다”는 게 이유였다. 20년 넘게 이곳에서 부동산업을 하는 박정옥씨는 건물 내놓겠다는 말에 화들짝 놀라 물었다. “원장님, 진짜 (건물) 내놓으려고예?”

그러나 박 간호사가 범천의원에서 일하기로 결심을 바꾸면서 병원은 다시 운영됐다. 간호사가 출근하지 않는 토요일, 81세 의사는 요즘도 환자들에게 직접 주사를 놓는다.

안 원장을 마지막으로 본 지난 19일 오후 5시40분. 안 원장은 낡은 나무 책상에 굴러다니는 빨강, 검정색 볼펜 두개를 흰 메모지 위에 십일자로 가지런히 정리했다. 그러곤 형광등을 끄고, 병원 문을 닫았다. 병원을 나서며 중얼거렸다. “아이고, 이제 고만둘 때가 다 됐지.”

그는 안철수의 아버지이자, 범천4동 주민들의 48년 지기 이웃이다. 그리고 의사다.

부산=박유리 기자 nopimula@kmib.co.kr 기사모아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