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항 논설위원의 그 숲길 다시 가보니] 내소사 전나무 숲은 태풍을 이겨내고

기사승인 2014-09-21 16:4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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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이 지나고 일주일을 훌쩍 더 넘겨도 목백일홍 꽃이 지지 않는다. 시인 안도현은 “배롱나무가 더 이상 꽃을 밀어 올리지 않을 때 가을은 온다”고 했지만, 기후변화 탓에 길어지는 여름을 꽃도, 열매도 서둘러 뿌리칠 수는 없나 보다. 계절과 상관없이 언제, 어느 때 가도 좋은 곳이 있다. 고창 선운사 주변과 부안 변산반도는 어떤 심리상태에서도 마치 고향처럼 포근하고, 그러면서도 정겨운 풍광과 해안, 다양한 나무, 풀들 덕분에 심심하지 않다. 화사한 봄꽃, 하늘을 가리는 짙푸른 녹음, 단풍 터널, 눈 쌓인 산사와 전나무숲, 다양한 문화재, 훌륭한 음식 등 어느 것 하나도 빠지지 않는다.


변산반도나 고창에서는 계곡을 따라 평탄한 길만 걸어도 좋고, 그다지 높지 않는 산을 올라도, 오르지 않아도 된다. 설악산이나 지리산 1박2일 산행이나 종주산행에 나서기 직전 아무래도 약간은 두렵고, 긴장되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서울의 북한산 어디에서든 우비나 우산 없이 갑자기 큰 비를 만나도 30분이나 1시간 안에 편의점 있는 마을로 내려 올 수 있다는 편안함과 비슷한 느낌을 이곳에서는 늘 가질 수 있다.



어느 계절에나 정겹고 다채로운 변산반도

지난 11일과 12일 4년 만에 다시 변산반도를 찾았다. 변산반도의 산들은 꼭 어릴 적 병정놀이를 하던 동네 뒷산 같다. 그만큼 정겹고, 아기자기하다. 하지만 조금 깊이 들어가면 만만치 않게 다양한 수종의 숲과 물이 풍부한 댐과 폭포, 그리고 계곡을 만난다. 변산에서는 비는 지나가고 눈은 머무른다는 말이 있다. 봄부터 가을에 강수량이 적은 대신 일조량이 풍부하다. 그래서인지 변산의 3가지 명물로 소나무, 난, 그리고 벌꿀을 든다. 키 큰 나무들이 많지 않으니 햇볕을 잘 받아야 잘 자라는 소나무가 번성한다. 난은 사람들이 하도 캐가는 바람에 옛 얘기가 돼 버렸다. 꿀 주산지라는 명성 역시 토종벌의 감소에 따라 양봉업자들이 전국의 산을 돌아다녀야 하는 실정이라 옛날 얘기가 됐다.

내소사 전나무 숲길, 3년전 태풍으로 40여 그루 전도 또는 고사

150년 전부터 조성된 내소사의 전나무 숲길은 월정사의 그것에 버금가게 아름다운 곳으로 손꼽힌다. 내소사 매표소를 지나면 20~30m 높이로 쭉쭉 뻗은 전나무 숲이 사천왕문 앞까지 가는 흙길 600여m 양옆에 도열해 있다. 측백나무와 함께 피톤치드향이 가장 많이 나오는 침엽수인 전나무는 원래 높은 산의 춥고 습한 곳에서 잘 자란다. 소나무와 달리 햇볕이 적은 곳에서도 잘 자라지만, 공해에는 약한 편이어서 깊은 산에 들어서야 만날 수 있다. 그러나 사찰들은 속성수로서 목재가치가 높은 전나무를 많이 심었다. 그래서 자생지 풍토와 상관없이 따뜻한 남부지방에서도 전나무 인공림이 쉽게 눈에 띈다.


이 숲길은 여름철에 햇볕을 완전히 가릴 정도로 무성했지만, 지금은 숲 가운데 한 곳이 휑하니 비어있었다. 국립공원관리공단에 따르면 2012년 태풍 불라벤의 영향으로 전나무 30여 그루가 넘어졌고, 10여 그루는 줄기가 꺾여나갔다. 부러진 전봇대처럼 반 토막만 남은 전나무들은 고사했다. 원래 뿌리를 깊게 내리지 못하는데다 곧게 자라는 줄기의 중간부근 위쪽에 가지와 잎이 주로 나오는 바람에 무게중심이 높은 곳에 있어서 강풍에 약하다는 것이다. 햇빛을 구하려고 등을 구부리지 않고, 부러질지언정 휘지는 않는 절개가 꼭 대쪽같은 선비를 연상시킨다.



뻥 뚫린 하늘 틈 타서 외래종 침입… “결국 도태될 것”

국립공원관리공단이 2007년 조사한 결과 모두 1000그루를 살짝 밑도는 전나무의 가슴높이 지름은 28~52cm, 평균 30cm이상이다. 나도밤나무, 산딸나무, 때죽나무, 당단풍, 팽나무, 노린재나무 등 아교목과 관목들이 함께 자라고 있다. 그러나 내소사측은 2011년 숲가꾸기 사업을 통해 일부 큰 개체를 제외한 이들 대부분을 제거했다. 1년 후 전나무 태풍피해가 발생한 것이다. 일부 전문가는 아교목과 관목들이 태풍의 영향을 완화해 전나무를 보호해 준다고 말하지만, 국립공원관리공단의 오장근 박사는 낙엽송(일본잎갈나무), 편백 조림지 등의 경우 관목이 없는데도 온전히 유지되는 것을 보면 그렇지는 않다고 말한다. 그렇더라도 내소사 입구 전나무터널의 여름철 하늘이 뻥 뚫린 것에는 진한 아쉬움이 남는다. 전나무 숲 가장자리에만 있던 미국자리공 같은 외래종이 빈 자리에 번성하기 시작했다. 현재 이 곳 관목 중에는 땃두릅과 싸리가 우점종으로 등장했고, 복분자, 엄나무, 사위질빵 등이 나타나고 있다. 그렇지만 전문가들은 시간이 지나면 외래종은 결국 도태될 것이라고 본다.

전도된 전나무 30여 그루 가운데 한 그루만 남기고 모두 치워버린 것도 바람직했는지 의문이다. 숲 속에는 생산자인 식물과 소비자인 동물, 그리고 분해자인 이끼, 조류, 버섯 등 지의류와 선태류, 지렁이와 나무 목질부를 먹는 흰개미 등이 있다. 분해자들은 죽어서 넘어진 전나무를 흙으로 되돌리고, 그 자양분을 바탕으로 새로운 풀과 관목 및 전나무 후계목들이 차례로 자라난다. 긴 세월에 걸친 이런 숲의 순환과정을 보고 이해하는 것은 탐방객들에게 더 없이 좋은 자연교육이 된다. 내소사의 전나무 숲은 이렇게 대를 이어갈 것이다. 숲을 나오는 길에 붉노랑상사화 한 송이를 발견했다. 잎이 다 사라지고 난 뒤 8월에 피는 꽃은 이미 다 졌지만, 다행히 한 송이가 남았다.



난온대 상록활엽수들의 북방한계선

산과 바다가 공존하는 변산반도는 바닷가 식물과 산지 식물이 모두 풍부하다는 식물학적 특징을 보인다. 난온대 상록활엽수림과 중부지방의 낙엽활엽수림이 공존한다. 남방계 식물 가운데 이곳까지 올라와 자라고 있는 식물이 많다. 상록활엽수인 후박나무, 호랑가시나무, 꽝꽝나무 등은 모두 변산반도가 북방한계선이다. 그런가하면 한국특산종으로 멸종위기식물인 미선나무는 이곳이 남방한계선에 해당된다. 변산반도내 이들 4개 나무 군락지는 모두 천연기념물로 보호되고 있다.


발길을 돌려 천연기념물(370호)로 지정된 부안군 상서면 청림리 미선나무 자생지를 둘러봤다. 개나리와 같은 물푸레나무과라서 꽃받침이 4가닥으로 같지만, 꽃부리 색깔이 흰색이라는 점이 다르다. 꽃이 잎보다 먼저 나고, 가지 끝이 땅으로 처지는 것도 개나리와 같다. 4월에 꽃이 피는 미선나무는 변산반도 국립공원의 식물 가운데 노랑붓꽃과 함께 멸종위기식물에 등재돼 있다. 데크형 울타리에 올라 자세히 살펴보니 꽃인지 열매인지 하트모양의 분홍빛 섞인 연두색 열매가 보였다. 미선나무라는 이름의 한자는 열매모양이 부채를 닮아 꼬리 미(尾), 부채 선(扇)자를 쓴다.



해안가를 따라가다 모항 근처 도로변에서 호랑가시나무 군락지(천연기념물 122호)를 만났다. 키 2~3m의 호랑가시나무 700여 그루가 보호 울타리 안에서 자라고 있다. 크리스마스카드에 자주 등장하는 이 상록수는 가을부터 겨울까지 빨간 열매를 주렁주렁 달고 있다. 이런 흔치 않은 특성 덕분에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다. 게다가 잎의 모서리 2~5군데(각점, 角点)가 가시처럼 뾰족해서 까칠하고, 강렬한 느낌을 준다. 가죽처럼 두꺼운 잎의 끝을 손으로 만져보니 진짜 따갑다. 호랑이가 등을 긁는데 쓸만하다 해서 호랑가시나무, 그리고 호랑이등긁기나무라는 이름이 붙었다. 또한 새끼고양의 날카로운 발톱 같다고 해서 묘아자(猫兒子)라는 별명도 갖고 있다. 주로 전남 남해안과 제주도 서해안에 분포하고 있다.


제법 번화한 관광지인 격포항 부근에는 후박나무 군락지(변산면 격포리, 천연기념물 123호)를 만났다. 바다와 바로 마주보고 있는 언덕에 약 4m 높이의 후박나무 십여 그루가 웅크리고 있다. 이곳 해안가 200m에 걸쳐 모두 132그루의 후박나무가 대나무, 사철나무, 송악 등과 함께 자란다. 후박나무는 웅장한 나무의 자태와 봄에 돋아나는, 붉게 물 들은 새 순이 인상적이다. 흑자색으로 익는 열매가 마침 익기 시작했다. 멸종위기종인 흑비둘기의 먹이다. 제주도, 울릉도와 남해안 섬들에서 해안가의 방풍림이나 마을 정자나무로 사랑을 받고 있다.

[임항 논설위원의 그 숲길 다시 가보니] 내소사 전나무 숲은 태풍을 이겨내고

사라져 가는 식물들, 캐가는 손과 지키는 손

부안군 상서면 청림리의 쇠뿔바위 밑자락 산비탈에는 변산바람꽃 군락지가 있었다. 그러나 1993년 이 꽃이 처음 발견된 이래 십수년 전부터 이른 봄이면 사진작가들이 몰려와 아무데나 주차하는 바람에 주민들과 다툼이 잦았다. 2012년에는 청림마을 청년회장이 홧김에 포클레인으로 변산바람꽃 100여 개체 자생지를 갈아엎어 버렸다. 청림마을은 2011년 국립공원 구역조정을 통해 마을지구로서 국립공원에서 제외됐다. 하지만 마을주민과 사진동호회간의 충돌은 바람꽃이 피는 기간에는 매해 일어나고 있다. 여러 종의 바람꽃 가운데 가장 일찍 피는데다 꽃이 예뻐서 지나친 관심 탓에 수난을 겪기도 하지만, 변산반도 외에도 남부 지방 곳곳에서 볼 수 있어서 법정보호종은 아니다.

이곳에도 안타깝게 사라져가는 식물들이 있다. 무수한 난과 소사나무, 그리고 바닷가 식물들이다. 소사나무는 분재용으로 선호되는 수종이어서 무분별하게 채취됐다. 난은 하도 캐가서 마을 주민들은 이제 변산에 ‘똥난’만 남았다고 자조한다. 봄을 알리는 야생난초인 보춘화의 경우 내소사 전나무 숲에도 몇 개체 있었으나 관목을 쏚아낼 때 모두 사라졌다. 최근 조성된 해변 걷는 길인 부안변산마실길을 따라가면 모래땅이나 사구에 살고 있는 갯방풍과 초종용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식물 가운데 버릴 것 하나 없는 갯방풍은 뿌리가 중풍을 예방하는데 효능이 있는 것으로 알려지면서 개체수가 급감했다. 더부살이식물인 초종용은 많은 모래땅이 매립되면서 급속히 사라져가고 있다.

그렇더라도 훨씬 더 많은 식물종이들이 변산반도에 건재하고 있다. 변산반도 국립공원은 대대손손 이어갈 전나무 숲과 더불어 변산바람꽃, 붉노랑상사화와 상사화, 멸종위기종인 노랑붓꽃과 미선나무 등 희귀식물과 갯까치수염, 갯방풍, 갯기름나물, 모래지치 등 다양한 바닷가 식물의 보고로 남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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