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절한 쿡기자] ‘갑’이 돼버린 개훔방, 또 다른 ‘을’들이 운다

기사승인 2015-03-03 16:2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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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절한 쿡기자] ‘갑’이 돼버린 개훔방, 또 다른 ‘을’들이 운다

[쿠키뉴스=권남영 기자] 영화계 ‘갑질’을 정면으로 비판한 영화 ‘개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이하 개훔방)’이 다시 논란의 중심에 섰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번엔 입장이 다릅니다. 대기업 횡포에 갈 곳 잃었던 작은 영화 때문에 ‘더 작은’ 영화는 설 곳을 잃었습니다.

독립영화 ‘조류인간’을 연출한 신연식 감독이 용기를 냈습니다. 지난 2일 보도자료를 내고 ‘개훔방’을 배급한 배급사 리틀빅픽처스를 향해 직격탄을 날렸습니다. 그는 “독립영화전용관에서 상업영화를 재개봉한 행위를 즉각 중단하라”고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신 감독은 “평범한 독립영화의 경우 5개 관을 배정받기도 어렵다”며 “상업영화인 ‘개훔방’이 15개 이상의 극장을 배정받는 것은 독립영화계에는 엄청난 폭력”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일련의 상황을 신 감독은 이렇게 비유했더군요.

“고등학생이 대학생에게 폭행을 당했다고 억울해하면서 유치원 놀이터에 와서 폭력을 행사하는 행위입니다.”

앞서 ‘개훔방’은 대기업 수직계열화 문제를 정면으로 비판했습니다. 배급사 대표는 사퇴라는 초강수까지 뒀습니다. ‘개훔방’ 개봉 당시 리틀빅픽처스 대표를 맡고 있던 엄용훈 전 대표는 흥행부진의 책임을 안고 보직을 내놨습니다. CJ엔터테인먼트가 배급한 영화 ‘국제시장’이 관객 1000만명을 돌파한 바로 다음날이었죠. 사퇴문에서 그는 대형배급사 상영관 독식 문제를 꼬집었습니다.

엄 전 대표의 노력은 계속됐습니다. 각종 언론 매체와의 인터뷰에 나섰습니다. 자신의 페이스북에 박근혜 대통령을 직접 겨냥한 장문의 호소문을 올리기도 했죠. 요약하면 대기업 수직계열화에 따른 몰아주기 행태를 근절하기 위한 법을 제정해달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최근엔 MBC ‘PD수첩-스크린을 훔치는 완벽한 방법’ 편 등에 출연하기도 했습니다.

절절한 호소에 뜨거운 호응을 일었습니다. 많은 관객들은 “좋은 영화를 지키자”며 한 목소리를 냈습니다. 결국 지난해 12월 29일 개봉했다 스크린에서 내려간 ‘개훔방’은 지난달 12일 전국 40여개 극장에서 재개봉됐습니다. 현재 일부 독립예술영화관을 비롯한 전국 48개 상영관에서 상영 중이죠. ‘개훔방’은 제작비 25억원을 들여 만든 엄연한 상업영화인데 말입니다.

신 감독은 “상업영화가 어떤 이유에서든 독립영화전용관에서 재개봉이 된다면 이후에도 극장 개봉을 마친 상업영화가 IPTV 매출 증대를 위해 독립영화관에서 재개봉되는 선례로 남게 될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이어 “다양성에 가치를 두고 독립영화를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독립예술영화관에서 특정 영화가 50개 이상의 극장을 점유하는 것은 그 자체로 다양성의 가치를 훼손하는 일”이라고 지적했죠.

논란이 일자 ‘개훔방’ 측은 “확대 상영을 할 때부터 다른 독립영화에 피해가 되지 않도록 일반상영관을 위주로 해달라고 극장 측에 요청했다”며 “상영관 배정은 극장 재량이지만 ‘개훔방’의 확대상영이 독립 영화에 피해가 된다면 조치를 취하는 방안을 검토하겠다”는 입장을 전했습니다.

멀티플렉스 극장을 보유한 CJ, 롯데 등 대기업들이 영화 사업에 나서면서 대두된 스크린 독과점 문제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갑과 을의 구조가 너무 자연스럽게 뿌리내려버렸죠. 혁파해보자고 나섰는데 오히려 또 다른 갑·을 간 대립으로 번졌습니다. 대체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하는 걸까요. 기본만은 확실합니다. 바스라지기 쉬운 작은 것들부터 지켜내야 한다는 것 말이죠. kwonny@kmib.co.kr 기사모아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