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로 제작되는 ‘효주양 사건’은?…7개월새 2번 유괴, 1970년대 후반 국민들 충격

기사승인 2014-09-18 10:3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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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후반 전국을 떠들썩하게 한 ‘효주양 납치사건’이 영화로 만들어진다.

영화 제작사 제이콘컴퍼니는 이 사건을 소재로 한 형사수사물 ‘극비수사’를 부산과 대전 등에서 촬영 중이라고 18일 밝혔다. 영화 ‘추격자’ 등에 출연한 배우 김윤석과 최근 ‘해적’에서 열연한 유해진이 주연을 맡았다. 메가폰은 ‘친구’ 시리즈로 유명한 곽경택 감독이 잡았다.

부산 재력가로 알려진 정모(당시 42세)씨의 딸 효주양(12세)은1978년에서 이듬해에 걸쳐 유괴만 두 번을 당했다.

4남매 가운데 외동딸인 효주양은 1978년 9월 15일 낮 12시 20분 재학 중이던 부산의 옛 남성국민학교에서 하교길에 골목길을 내려오다가 대기하고 있던 검은색 승용차 운전자에 의해 유괴됐다.

그는 1960년 12월 경무대 경호책임자로, 발포명령 혐의로 구속됐던 곽영주의 아들을 유괴하고, 1964년에는 100원짜리 위조지폐를 만들어 사용하다가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전과 9범의 매석환(당시 42세)이었다.

아버지가 빚을 져 유괴를 시도했다는 매석환은 효주양을 차 트렁크에 태우고 서울, 부산, 수원 등지를 오가며 도망 다녔다. 그는 효주양을 유괴한 지 33일째 되는 날에 효주양의 이모에게 전화를 걸어 5000만원을 요구하다가 극비리에 수사 중인 부산진경찰서 소속 공길용 경사에게 덜미를 잡혔다.

공 경사는 효주양 사건을 포함해 1971년 부산 송미장 여관 암달러상 살해범 검거, 1975년 영도 청학동 수출품 컨테이이너선 도난사건, 이후 1980년 미국문화원방화사건을 해결하는 등 4번의 특진을 통해 순경에서 경감까지 올라간 입지전적 인물이다. ‘마지막 형사’ ‘포도왕’ 등의 별명으로 불렸다.

경찰은 이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납치 차량 번호판을 알아내려고 최면술 수사기법을 도입하고, 유명 무속인 김중산에게 점을 보게 하는 등 보기 드문 방법을 시도했다.

그러나 무사히 집으로 돌아온 효주양에게 불과 7개월 뒤 두 번째 악몽이 찾아왔다.

효주양이 등교를 하던 1979년 4월 14일 오전 8시 15분에 부산시 중구 대청동 메리놀병원 앞길에서 비닐로 차 번호판을 가린 승용차에 타고 있던 괴한이 또 납치를 한 것이다. 첫 사건 후 가족들이 매일같이 등하교를 함께했는데, 딱 하루 거른 날 다시 유괴된 것이다.

1년도 안 되는 시간 동안 한 소녀가 두 번의 유괴를 당했다는 소식에 온 나라가 충격에 빠졌다.

최석원 당시 부산시장은 시민에게 “효주양 구출에 협조해 달라”며 효주양의 사진이 든 전단 60만 장을 배부했고, 효주양의 아버지 정씨도 TV에 출연해 “딸을 살려만 준다면 어떤 조건이라도 부모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하겠다”고 호소했다.

1차 사건 범인 매석환이 2차 유괴범에게 자수를 권유하는 편지를 쓰기도 했다.

사건발생 5일째인 4월 18일엔 범죄사건과 관련해 사상 최초로 대통령의 특별 담화가 발표됐다.

박정희 대통령은 담화문에서 “죄를 뉘우치고 효주양을 무사히 돌려보낸다면 관계기관에 죄과를 관대하게 다루도록 하겠다”며 범인을 회유하기도 했다.

담화가 발표된 날 저녁 10시 50분 효주양이 경부고속도로 경주톨게이트 인근에서 택시기사에 의해 발견되면서 두 번째 사건도 막을 내렸다.

1년 8개월 뒤 검거된 범인은 효주양 아버지 밑에서 운전기사 일을 했던 이원석(당시 25세)이었다.

이씨는 경찰에서 “병으로 일을 할 수 없게 돼 편히 사는 방법을 찾다가 효주양을 유괴했다”면서 “압박감 때문에 범행을 포기하게 됐다”고 진술했다.

김현섭 기자 기사모아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