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 인 심리학] 전병욱과 감싸는 자들의 웃기지도 않는 ‘착각쇼’

기사승인 2015-05-07 05:0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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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 인 심리학] 전병욱과 감싸는 자들의 웃기지도 않는 ‘착각쇼’

요즘 전병욱 홍대새교회 목사가 이슈의 중심에 있다. 그는 지난 1993년 삼일교회에 부임해서 80명의 교인들을 10년 만에 100배로 성장시켜 한국교회의 차세대 지도자로 주목받은 인물이다. 사실 필자의 책장에도 전 목사의 책이 5권이나 꽂혀 있다. 표현을 해보자면 필자는 그의 ‘팬’이었다.

하지만 최근 전 목사의 저서들을 버렸다. 15년 째 교회에 다니고, 신학대 강단에 서고 있는 필자도 일부 네티즌들이 기독교를 ‘개독교’라고 비꼬는 것에 ‘공감’을 했다. 단순히 전 목사란 인물의 ‘성추행 논란’ 사건 때문이 아니다. ‘진리’를 전파하는 종교가 ‘진실’에 눈을 감는 모습을 봤기 때문이다.

전 목사에 성추행 피해를 당했다는 증언들에 따르면 그는 목회실 안에서 여성 신도에게 구강성교를 강요했고, 예배시간 중간에 찬양대원을 성추행 했다. 성추행 피해자 중엔 결혼을 앞둔 여신도도 있었다.

하지만 피해자들은 오히려 교회 내부에서 이단이나 ‘꽃뱀’ 취급을 받아야 했다. 그리고 지난 4일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 총회 임원회 등에 따르면 개신교단은 삼일교회가 “전병욱 목사를 면직 혹은 징계해달라”며 총회에 제기한 상소장을 지난달 23일 ‘반려’했다.

이 사건에서 두 가지 문제점에 대해 심리학적 관점에서 분석해 보도록 하겠다. 하나는 종교지도자의 도덕성 타락의 원인과 도덕성이 타락한 종교지도자를 두둔하는 원인에 대해 분석해 보도록 하겠다.


에드워드 홀(Edward T. Hall)은 1965년에 ‘근접학(Proxemics)’을 소개하면서 ‘인간관계의 거리’에는 4가지 유형이 있다고 했다. 가장 가까운 ‘친밀한 거리(intimate distance zone)’, 두 번째 거리인 ‘개인적인 거리(personal distance zone)’, 세 번째 거리인 ‘사회적인 거리(social distance zone)’ 그리고 마지막 거리인 ‘공적인 거리(public distance zone)’이다.

가족들끼리는 개인적인 거리, 사회적인 거리, 공적인 거리가 전혀 인정되지 않는다. 너무 가까운 ‘친밀한 거리’만 존재하다 보니 구성원들의 개인적 공간은 확보되지 않게 된다. 부모가 자식의 일기장을 마음대로 보고, 전화기의 메시지 내용을 열어보고, 자신의 감정을 이미 알고 있다는 듯 조언하는 경우는 ‘친밀한 거리’의 모순이다. 가깝고 친밀하기 때문에 오히려 힘든 일이 생길 수 있는 것이다.

이 친밀한 거리는 45.7cm 미만으로 이야기 한다. 반면에 개인적인 공간은 45.7cm에서 1.2m에 해당한다. 1m 정도는 개인적인 거리이기 때문에 이성이나 계급 간에 이 거리에 무작정 들어간다면 상대방은 ‘방어’를 하게 된다. 최소한의 개인적 공간에 침범하는 것은 상대방으로 하여금 내성적인 경우에는 ‘불안함과 공포감’을 유발하고 외향적인 경우에는 ‘공격성’을 유발한다. 이 개인적인 거리는 물리적인 거리뿐만 아니라 언어적인 거리도 마찬가지다.

반대로 사회적인 거리는 2m에서 3.8m이다. 그리고 공적인 거리는 3.8m 이상이다. 2m의 물리적인 거리만 하더라도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다른 제3자를 개입시킬 수 있을 ‘간격’이 생긴다. 이런 간격의 가능성으로 인해 불안함이나 불편한 감정은 개인적 거리와 비교했을 때 상당히 줄어들게 된다. 공적인 거리는 4m 정도로 연설자와 청중, 리더와 따르는 자들의 관계에 해당한다. 청중과 따르는 입장에서 가장 편안한 공간이다. 자신과 같은 입장의 제3자들이 마치 자기와 같은 상황을 함께 겪는 것처럼 느끼기 때문에 동병상련의 심리를 가진다.

이렇게 가장 편안하게 유지되던 ‘공적인 거리’가 연설자와 리더의 일방적인 침범으로 인해 사회적인 거리와 개인적인 공간을 넘어 친밀한 공간까지 깨진다면 ‘공포감’에서 ‘공격성’까지 동시에 모든 복잡한 부정적인 감정이 휘몰아치게 된다. 더 짧게 표현해보면, 천천히 다가오면 부담이 없지만 중간 단계 없이 갑자기 다가오면 당사자는 ‘우울’이나 ‘불안’ 증세를 겪게 되는 것이다.

반대로 종교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언어 능력’을 끊임없이 맛보는 위치에 서 있다. 이 능력으로 인해 공적인 거리에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여서 감동시키기도 하고 깨달음을 주다보면 자신들도 모르게 물리적인 ‘공적인 거리’를 무시하고 ‘친밀한 거리’에 같이 있는 것과 같이 여기게 된다.

이러다 보면 스스로의 언어적 능력에 빠져서 착각을 하게 될 수 있다. 이 착각은 상대방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시각’이 사라지는 현상이다. 자기가 바라보는 것만 옳다고 생각하고, 물리적인 거리는 공적인데 친밀한 거리라고 착각하게 된다. 이런 과정을 통해 종교 지도자들은 도덕성이 타락하게 된다.

이제 두 번째 문제인 타락한 종교지도자를 두둔하는 사람들의 원인을 살펴보자.

바로 위에서 말한 ‘공적인 거리’에 있으면서 청중 입장인 사람들은 연설이나 설교를 들을 때 마치 ‘자기에게 말하는 것’처럼 느끼게 된다. 청중들은 듣는 입장에서 연설이나 강의, 설교 등의 내용이 자신의 상황과 일치하면 일치할수록 그리고 감동이 되면 될수록 순식간에 언어적인 ‘친밀한 거리’로 착각하게 된다.

연설 전에는 가까이 다가가지도 못하다가 연설이 끝나고 난 이후에는 손을 잡고 악수를 하려고 하는 것은 이미 착각하고 있는 ‘친밀한 거리’의 감정을 행동으로 실현시키려고 하는 심리에서 나오는 것이다.

이 착각이 변하지 않고 이어지면 고착화가 돼 ‘심리적 친밀한 거리’로 인해 리더나 종교지도자가 도덕적인 타락을 하더라도 원래 있는 ‘공적인 거리’로 되돌아가기가 힘들게 되는 것이다. 자신이 스스로 착각하고 있던 언어적 힘을 스스로 무너뜨리는 것이 인간에게는 가장 힘든 것이다.

이번 전 목사의 성추행 사건뿐만 아니라 모든 종교 지도자들이 ‘진실 된 공적인 거리’를 유지해서 더 이상의 도덕적 타락이 없길 기대한다.

계몽을 의미하는 영어는 ‘enlighten’이다. 접두사와 접미사의 ‘en’을 빼면 결국 계몽이라는 것은 ‘빛을 밝혀주는 것’이다.

지식도 종교도 어두운 것을 밝혀 주는 것이다. 말과 행동에 대해서 무의식적으로 수용하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두운 상태에서 글을 읽는 것과 같다. 내 자신이 어떤 삶을 살았고 어떤 문제가 있는지 알아야 한다. 그리고 자신의 문제가 있으면 ‘인정’을 하고 고쳐야 한다. 그것이 ‘의식적인 수용’이다. 자신의 문제점을 인정하는 것은 스스로를 ‘밝게 비추는’ 첫 단계이다.

이재연 대신대학원대학교 상담심리치료학 교수

정리=김현섭 기자 afero@kmib.co.kr 기사모아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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