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아에게 화풀이?” 논란으로 시작해 야유로 얼룩진 닥터후 내한

기사승인 2014-08-12 00:0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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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는 영국 BBC의 SF드라마 ‘닥터후’ 출연진이 월드투어의 일환으로 9일 한국을 찾았습니다. 8시즌 방영을 앞두고 홍보차 내한한 것이지요. 닥터후는 1963년 처음 방영돼 50년간 이어진 ‘세계 최장수 드라마’입니다. 기네스북에도 등재됐죠. 그만큼 드라마의 인기는 대단합니다. 닥터후의 팬을 지칭하는 ‘후비안’이라는 단어까지 생겼을 정도입니다.

이번 월드투어는 50년 역사상 가장 큰 프로모션 이벤트로 기록됐습니다. 5개 대륙 7개 도시에서 진행되지요. 7일 영국의 카디프를 시작으로 서울(한국)을 방문한 뒤 시드니(호주), 뉴욕(미국) 멕시코시티(멕시코), 리우데자네이루(브라질)에서 팬들을 만납니다. 눈치 채셨나요? 아시아에서는 서울이 유일합니다. 한국의 후비안들의 기대는 어느 때보다도 높았지요.

그런데 한국에서 열린 팬미팅 겸 상영회에서는 난데없는 야유가 터져 나왔습니다. 게스트로 아이돌 그룹 제국의 아이들의 세 멤버 광희와 희철, 케빈이 무대에 오르자 반응이 싸늘해진 겁니다. 세 사람이 무대에 있는 내내 야유가 이어졌습니다. 농담 삼아 건넨 말에도 반응은 험악해져만 갔습니다.

함께 있던 닥터후의 주연배우 피터 카팔디와 제나 루이스는 어리둥절했습니다. 제아의 세 멤버들은 예상치 못한 반응에 당황한 듯 어색한 표정만 지어보였지요. 오죽하면 사회자가 “여러분, 그렇게 하는 건 매너가 아닌 것 같습니다”라고 객석의 자제를 촉구하기까지 했습니다.

이런 반응은 행사에 가진 불만이 엄한 방향으로 터져 나온 것으로 보입니다.

닥터후의 내한은 한 달여전 처음 소식이 알려졌을 때부터 잡음이 많았습니다. 당초 한국 행사 주최 측은 행사 관련 사항을 ‘타티스 크루’라는 팬 카페와 논의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 카페 회원이 아닌 다른 후비안들로부터 반발이 나왔지요. 더구나 장소 대관도 원활하지 못해 수용인원이 200석정도 밖에 되지 않는 곳에서 행사를 연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팬들은 또 흥분했습니다.

결국 장소는 1000여명 이상을 수용할 수 있는 서울 63스퀘어 그랜드볼룸으로 옮겨졌고, 티켓도 추첨이 아닌 예매방식으로 결정됐습니다. 하지만 무료로 오픈된 티켓은 불과 몇 분 만에 동이 났습니다. 이후 암표는 15만원선에 거래되기도 했습니다. 크고 작은 문제가 잇따라 지적되며 ‘닥터후 내한 사태’라고 일컬어지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제아에게 화풀이?” 논란으로 시작해 야유로 얼룩진 닥터후 내한

잔뜩 쌓인 불만을 안고 행사장을 찾은 후비안들에게 갑작스런 아이돌의 등장은 반갑지 않았을 겁니다. 손꼽아 기다렸던 피터·제나와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이 줄었을 테니까요. 하지만 행사를 축하하고자 영문도 모른 채 자리한 제아 멤버들에겐 고난의 시간이었습니다.

이런 후기와 영상들이 전해지며 인터넷에는 11일까지도 비난의 목소리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여러 네티즌들은 “제아가 무슨 죄냐” “내가 다 민망하다. 멤버들 불쌍하다” “왜 엄한 데에 화풀이를 하느냐”고 질타했습니다. 또 행사 영상이 인터넷을 통해 생중계된 점으로 미루어 “수준 낮은 매너, 세계적인 망신이다”는 지적도 나왔습니다.

비난 여론이 커지자 행사를 주도한 격이 된 타티스 크루 측은 사과글을 올렸습니다. 카페 운영진은 “제아를 직접 겨냥한 인식 공격이나 이유 없는 비방과 욕설은 마땅히 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고, 비매너적이며 지탄받아 마땅한 행동들이었다”며 “제재 및 단속이 적절히 이루어지지 못한 점에 대해 송구스럽게 생각한다”고 사과했습니다.

하지만 “많은 후비안들이 열망했던 행사가 만족스럽게 이루어지지 못한 것에 대한 분노를 어느 정도 이해해주셨으면 한다” “아이돌들이 홍보를 나온 것으로 비추어져 탐탁치 않게 생각할 수 있었다는 점을 고려해달라”는 등의 말을 덧붙여 또 다른 반발을 낳았습니다.

다른 네티즌들은 “사과가 사과가 아닌 듯한 느낌이다” “분노는 이해하지만 왜 이런 비매너까지 이해해야하는지 모르겠다”며 눈살을 찌푸리고 있습니다.

살면서 불만스러운 일은 수시로 발생합니다. 하지만 감정을 잘못 터뜨리면 내가 소중히 여기던 것까지 망쳐버릴 수 있습니다. 50년을 기다린 행사가 갈등과 야유로 얼룩진 것처럼요.

권남영 기자 kwonny@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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